UPDATED. 2024-04-25 18:50 (목)
비평정신: 내가 추구하는 비평
비평정신: 내가 추구하는 비평
  • 구모룡 한국해양대
  • 승인 2005.04.2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용 없는 맥락은 공허하다"

나는 비평가인가. 항상 뇌리를 떠나지 않는 물음이다. 어떻게 보면 나의 비평은 이 물음에 대한 최소한의 답변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직무를 유기하고 있다는 자책에 시달린다. 비평가로 산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적어도 해당 분야에 대한 정보와 흐름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엔 늘 힘에 부친다. 주변의 환경 또한 녹녹치 않다.

비평가로 사는 일은 고도의 전문성을 요한다. 문학비평가인 내가 이러한 전문성을 견지하려면 문학 현장에서 일어나는 구체적 사건들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매일같이 생산되는 텍스트를 해석하고 시시각각 부각되는 담론들에 개입하지 않으면 곧 바로 현실에서 밀려나는 것이 비평가의 존재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변함없는 비평 의지를 갖기란 쉽지 않다. 아마추어리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의혹은 현장을 벗어나 있다는 생각과 즉각 겹쳐진다. 비평가로서 나는 전직과 현직 사이를 오가면서 늘 위태롭다.

내가 추구하는 비평을 말하기 이전에 이처럼 나는 나 자신의 불안한 위상을 먼저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한 위상이 외적이기보다 먼저 내적인 데 기인함을 말하고자 한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비평가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도 성실성이다. 전문성을 잃지 않으려는 성실한 의지는 비평가의 안정적 위상을 보장한다. 성실성이 담보되지 못할 때 비평가는 자주 시비와 조롱의 대상이 된다. 내가 안경 속에 눈 대신 입을 그려 넣은 야스퍼 존스의 ‘비평가’라는 그림을 떠올릴 때가 많은 것은 나 자신의 불성실 탓이라 생각한다.

비평가의 위상을 불안하게 하는 외적 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두루 알다시피 이는 학자-비평가라는 겸직에서 비롯한다. 학자와 비평가가 상충하는 직업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제도적 요인들은 이들 관계에서 갈등을 부추긴다. 가령 논문중심주의는 비평과 비평가의 위상을 끊임없이 흔들며, 경우에 따라 비평을 여기로, 비평가를 외도로 인식되게 한다. 학자나 비평가나 전문성은 갖추어야 할 기본 전제이다. 여기에 개성적인 글쓰기 문제가 부가되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비평가의 전문성은 학자와 달라진다. 하지만 논문 중심의 학술 평가 제도는 비평의 가치를 격하한다. 따라서 역량 있는 많은 비평가들이 비평을 포기하고 아카데미즘에 안주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Jasper Johns, The Critic Sees, 1964, sculpmetal over plastic with glass, Lent by the Artist, Philadelphia Museum of Art. ©

끊임없는 자의식에 시달리면서도 나는 비평가이고자 한다. 무엇보다 이 길이 살아 생동하는 의미들과 늘 함께 할 수 있게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비평은 내가 추구하는 학문이나 사회적 실천과 분리되지 않는다. 학문과 비평과 실천은 상호 연계되면서 의미의 맥락들을 형성한다. 말할 것도 없이 내가 이러한 맥락 형성에 성공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학문에서도 비평에서도 실천에서도 늘 부족하고 힘들어하는 것이 내 자신의 솔직한 초상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들을 지속적으로 연계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그 형식과 절차에 있어 차이가 있지만 학문과 비평과 실천은 모두 의미를 생산하고 소통하는 데 의의를 둔다. 논문과 평론이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폐기되어야 할 쓰레기에 불과할 뿐이다. 논문이든 평론이든 먼저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고 다음으로 이를 소통시키는 데 그 가치가 부여된다. 그럼에도 형식만 있을 뿐 새로운 의미를 만들지 못하는 논문과 평론이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텍스트의 의미조차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글들이 버젓이 논문과 평론으로 발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글들이 비평을 기생적 장르로 오인하게 한다.

비평의 전문성은 또한 비평의 독자성이다. 이러한 독자성은 비평 스스로 의미를 생산하는 데서 얻어진다. 비평은 텍스트에서 시작되나 독자적인 의미를 완성함으로써 끝난다. 시인과 작가들은 비평의 이러한 독자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의도나 그들의 텍스트에 비평을 예속시키려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의미를 둘러싼 싸움은 치열할 수밖에 없다. 훌륭한 비평가는 이러한 싸움에서 이긴다. 그러나 삼류 비평가는 시인·작가의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이래서 나는 텍스트에 대한 성실한 독법과 더불어 새로운 의미 생산을 통하여 시인·작가를 설득하는 것이 문학비평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섣부른 가치판단보다 성실하게 의미를 소통시키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비평의 독자성은 의미의 생산과 소통에서 형성된다.

겸손이 훌륭한 덕목임에 틀림없지만 비평가가 시인·작가를 경배하고 그들이 생산한 작품들을 무조건 예찬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나는 비평가에게 부여되는 권력이 필요악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러한 비평 권력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바르지 못한 사용에 있는 것이다. 출판 자본과 결합된 해석공동체의 형성이 나쁜 비평권력을 만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중심부에 집중된 자본과 권력이 문화적 다양성을 억압할 가능성은 많다. 비평가의 자의식은 또한 자기 권력에 대한 정당한 해부로 발전해야 한다. 비평은 주체 중심의 원근법으로 의미들을 배치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궁극적인 타자성에 이르는 반성적 회로가 되어야 한다.

비평가로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비평 권력의 달콤한 유혹이 독이 되는 경우는 많다. 우리 사회의 문학적 장이 활력을 잃어가는 요인 가운데 하나로 비평 권력의 남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비평은 창조적인 의미 소통의 장이 되지 못할 때 스스로 위기의 기원이 된다. 비평은 늘 위기의 자식이다. 이래서 이것은 힘들고 위태롭다. 늘 자신의 불안정한 위치를 근심하면서 진정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비평가인가. 여전히 미달상태에 처한 자신을 본다. 나 자신의 비평적 위치를 반성하자면 먼저 적극적인 개입 의지의 부족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내가 지역의 비평가라는 데 기인하는 측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역이라는 창조적 위치를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닌가 반성해 본다. 한편으로 나는 나의 지역적 입장이 일종의 축복으로 느껴질 때도 많다. 능력이 허락된다면 제3의 비평적 지평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80년대 무크지 ‘지평’, 90년대 비평전문지 ‘오늘의 문예비평’, 2000년대 시전문계간지 ‘신생’ 등에 관여할 수 있었고 비판적 지역주의라는 개념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평가받을 만한 의미들을 얼마나 생산하였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비판적 지역주의라는 테제를 내세웠을 뿐, 이를 텍스트 해석으로, 이론 생산으로 크게 진척시키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나는 비평가이고자 한다. 그리고 또한 제대로 된 학자이고자 한다. 그러나 내 자신의 게으름과 무능 그리고 여러 가지 조건들이 만드는 피로들이 비평가의 삶을 힘들게 하고 있다. 아울러 학자의 길도 어렵게 한다. 이러한 데는 능력을 넘어서는 나 자신의 욕심이 작용한 바 없지 않다. 문학에서 문화로, 한국문학에서 동아시아학으로, 지역에서 세계로 그 맥락을 넓히고자 한 데 원인이 있다. 내용을 채우지 못한 맥락은 전정한 의미에서 맥락이 아니다. 이제 다시 문화론적 문학,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읽는 우리 문학, 세계적 문맥을 지닌 지역적 실천 등을 구체화해야 한다. 더 많은 시간을 공부에 투자해야 하는 데 더 많은 곁가지 일들이 공부 시간을 앗아가고 있다. 비평가로서의 위기보다 존재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구모룡 / 한국해양대·국문학

필자는 부산대에서 ‘한국근대문학유기론의 담론분석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구체적 삶과 형성기의 문학’, ‘한국문학과 열린 체계의 비평담론’, ‘제유의 시학’ 등의 저서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