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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고전] <12> E.P. 톰슨의『영국 노동계급의 형성』(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
[우리 시대의 고전] <12> E.P. 톰슨의『영국 노동계급의 형성』(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
  • 교수신문
  • 승인 2001.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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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30 15:45:43
E.P.톰슨 (1905-1944)
“E. P. 톰슨은 근, 현대를 통하여 가장 중요한 저술가, 역사가, 논객들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거의 반세기 동안 영국의 좌파문화와 정치에서 핵심 인물”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지적 활동과 역사학이 입게될 손실은 아직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1993년 8월 28일 톰슨이 타계한 직후 나온 이와 같은 추모사들은 학자와 사회운동가로서의 그의 탁월한 역량을 단적으로 표현했다. 톰슨은 힐(Christopher Hill), 홉스봄(Eric Hobsbawm) 등과 함께 20세기 후반 영국 역사학계를 이끈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국제 반핵운동의 중심에 서서 개혁을 이루려던 사회운동가였다.



조용욱 / 국민대·역사학

역사가로서 톰슨의 위상을 일시에 높여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1960년대 이래 유행한 사회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사회사 연구가 몰고 온 가장 큰 변화는 민중에 대한 역사가들의 새로운 관심이었는데, 특히 ‘아래로부터의 역사’(history from the bottom up)는 농민과 노동자들이 역사의 수동적 희생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역사를 스스로 만들면서 역사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능동적 주체라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역사서술의 전통을 선도한 것이 바로 톰슨의 이 책이었다.
톰슨이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집필하며 의도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당시 자유주의적 시각을 갖고 있던 사회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의 입장─사회계급이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거나, 설사 존재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안정에 기여하는 순기능적 요소라는 생각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목표는 톰슨 자신이 1956년 헝가리 사태 이후 결별하게 된 ‘천박한 맑시즘’(vulgar Marxism)의 시각-노동계급은 자본주의의 자동적이고 기계적인 산물로서 능동적이고 자의식적 활동력이 없는 존재로 보는 입장─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견해들 대신에 톰슨은 나름대로의 계급관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계급은 정태적인 구조(structure)나 범주(category)가 아니라 실제의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현상”으로서 고정된 물체(thing)가 아닌 움직이는 관계(relationship)다. 그리고 사람들이 단순히 어떤 역사적 상황에 던져짐으로써가 아니라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이해관계의 일치와 상충을 실제 “느끼고 경험함으로써” 사회계급이 생겨난다. 따라서 계급형성의 과정은 주체와 구조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며, 영국의 노동계급은 “그것이 만들어진 만큼이나 그 자신을 만들어갔던 것”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이렇게 계급의 본질과 계급형성의 과정을 정의한 후, 톰슨은 800쪽이 넘는 방대한 본문에서 1780년대에서 1832년에 이르는 반세기에 걸쳐 영국의 노동자들이 한편으로 경제적 곤궁과 정치적 탄압을 경험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율적인 문화적 학습과 내면적 성찰”을 통해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되어 등장하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그려냈다.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이용된 자료의 종류와 분량뿐만 아니라, 서술문체의 유려함과 논리전개의 정교함에 있어 단연 돋보이는 역작으로 평가되면서 출간 직후부터 큰 지적 파장을 몰고 왔다. 역사학은 물론이고 문학, 인류학, 사회학에서도 톰슨의 저작에 대한 관심이 줄을 이었다.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지적 형성기를 거친 많은 역사가들은 그들이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느낀 충격과 감동 그리고 그들이 지게된 ‘지적 부채’를 언급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톰슨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도 계급형성에 대한 논의나 노동사 연구의 전반에서 이 책이 오랫 동안 ‘연구의 이정표를 설정해준 필독서’였음을 인정했다.
이러한 지적 충격을 야기한 톰슨의 책은 당연히 많은 후속 연구에 의해 호응을 받은 만큼이나 비판도 받았다. 이 책에 대한 비판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톰슨은 계급형성이 주체와 구조간의 상호작용적 과정이라고 서문에서 말했지만 그가 실제로 본문에서 부각시킨 것은 주체의 자율적 활동이었다고 비판됐다. 그의 책에는 부분적으로 이러한 경향이 분명히 있었고, 톰슨의 영향을 받은 이후의 사회사 연구에서 이것이 더욱 심화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둘째, 톰슨은 영국의 노동자들이 계급의식을 갖춘 사회세력으로 1832년에 등장했다고 진단했지만, 많은 후속 연구들은 오히려 1880년대 이후의 시기에서 더 분명한 노동계급의 형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톰슨은 계급이 일단 형성되면 아무런 문제없이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했지만, 19세기와 20세기 영국 노동사는 계급은 형성될 뿐만 아니라 해체, 재편, 재구성의 역동적 과정을 겪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고 지적됐다.
톰슨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연구와 이에 대한 비판은 1960년대 이후 역사 이해의 지평을 크게 확장시켰다. 후속 연구에 의해 톰슨의 견해가 상당 부분 약화된 오늘날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이 여전히 ‘현대의 고전’으로 간주되는 것은 이 책이 어려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완전하게 제공해서가 아니라 계속 고민하고 음미해볼 시각과 실마리를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영국에 대한 톰슨의 다른 뛰어난 저술들과 더불어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앞으로도 계급과 계급형성에 관한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 재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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