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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비평 특집: (1)오늘날 고전의 의미와 기능
고전비평 특집: (1)오늘날 고전의 의미와 기능
  • 김상일 한신대
  • 승인 2005.04.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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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불멸이 고전의 핵심이다”

편집자주: 요즘처럼 많은 고전들이 번역돼 나오던 시절도 없었다. 서점가는 물론 중고교와 대학에서도 고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고전읽기로 학생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그에 비해서 고전이 주는 가치와 효과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성찰적 시선은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고전의 ‘나쁜 숭고’이자 고전이 오늘날 독자대중의 목에서 공허하게 울리는 싸구려 목걸이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케 한다. 고전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고 돌이 되어야지 그저 떠받들여져서는 곤란하다. 이에 고전의 번역과 출판, 읽기를 총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고전수용의 문화적 제도의 구축을 촉구하는 특집을 마련하였다.

김상일 / 한신대·동서비교철학

하필 왜 고전을 읽어야 하나. 한 세대가 지나가기만 해도 가치관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급변하게 변하는 오늘에 사는 우리에게 고전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그런가 하면 서점가에는 고전들이 신간을 능가할 정도로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도대체 이런 현상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 것인가. 미래를 조망하고 오늘을 해석하는 신간들만으로도 다 소화해 낼 수 없는 우리에게 고전은 도대체 읽을 실효성이 있는 것일까.

인류 문명사에 옛 것이 새 것을 변혁한 주요한 예들을 들어 보자. 우선 공자는 ‘述而不作’이라 했다. 자기는 자기 이전의 고전들을 읽고 풀이했을 뿐이지 자기가 무엇 새로 창조해 낸 것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공자 이전의 고전보다는 그것을 풀이하고 재해석한 공자의 사상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공자는 학문하는 방법론으로 ‘溫故知新’이라고 했다. 공자의 옛 것에 대한 평가와 새 것에 대한 수용 태도를 말 할 때에 이 말이 약방의 감초 같이 인용되곤 한다. 그러나 이 말보다 더 중요하고 오늘 우리에게 더 철학적인 의미를 주는 것은 논어 첫 머리에 있는 ‘學而時習’일 것이다. 공자의 이 말에 대한 성찰과 함께 고전을 읽는 근본적인 의의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고전을 읽어야 하고 오늘에 그것이 주는 의미는 한 갓 교양 읽기 차원을 떠나 우리 인식론의 근본적인 문제와 결부 될 것이다. 만약에 인간이 경험론 자 들이 주장하듯이 태어 날 때에 백지 상태라 한다면 해도 고전을 읽을 필요가 없고, 관념론자들과 같이 지식을 생득적으로 타고 난다고 해도 고전을 읽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만약에 백지 상태라면 매 시대마다 갓 나온 인간은 태어 날 순간부터의 지식 이외의 지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그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다른 인간과 공유하지도 않고 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 지식의 역사와 지도를 오직 자기 안에서만 독자적으로 그려 나가면 된다. 이런 경험론적 세계관에서 볼 때에 과거 경험이나 지식 같은 것은 한 예에 불과할 뿐 새롭게 경험하는 지식만이 절대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다른 한편 관념론적 입장에서 볼 때에 날 때부터 지식을 생득적으로 타고 났고, 그것이 인간이 경험으로 후천적으로 터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음 세대는 또 다시 하늘로부터 생득적으로 같은 지식을 갖고 태어남으로 결국 고전을 읽어 그것을 자기 경험 속에 축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천사들도 인간의 객관적 불멸 없앨 수 없다

이런 경험론과 관념론의 입장에 따라 과거 지식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크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두 견해가 모두 과거의 지식과 현재의 그것을 이어 나가는 데 합당한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의 지식에 대한 견해와 그것의 연장으로 과거의 지식이 얼마나 우리에게 유용한 가에 대하여 언급해 보기로 한다.

화이트헤드는 경험론과 관념론을 모두 비판한다. 우선 인간은 태어 날 때에 백지 상태가 아니라고 본다. 아무리 낮은 갓난아이의 경험이라도 이미 다른 동물이나 생물에 비해 관념론적이라 할 정도의 높은 정신 상태와 지식을 가지고 난다고 본다. 그리고 관념론자들에 대해서는 그것이 하늘이 준 생득적인 것이 아니고 과거 경험의 축적이 형성되어 현재의 경험이 된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한 존재의 정체성은 과거 경험의 축적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여 현재의 경험과 상호 간섭 interference를 해서 만들어 진다고 본다. 그래서 과거는 현재 속에 ‘객관적 불멸 objective immortality’을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과거 경험과 지식은 객관적 불멸이 되어 ‘엄연한 사실’로 다가온다.

이러한 엄연한 사실이 바로 고전이다. 고전은 오늘 우리의 정체성을 만드는 엄연한 사실이다. 여기 화성인이 지구에 도래했다고 하자. 그는 엄청난 지식의 양과 새로운 지식을 가지고 왔다. 그러면 그의 지식이 과연 우리에게 유용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새로운 지식이 지구인의 그것과 서로 조화를 찾자면 상당한 어려움과 문제가 따를 것이다. 화성인의 비유가 아니더라도 예수나 붓다 같은 철학자나 종교인들이 이 세상에 전대미문의 지식을 전하고 그런 말을 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들의 사상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공헌 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그들의 새로움이 지금의 우리에게 엄연한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험론이나 관념론자들은 이들의 기상천외의 지식과 영감이 새로운 인간과 문명을 창조해 낼 것이라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천상의 천사들도 인간의 과거 경험에서 온 ‘객관적 불멸’을 멸할 수 없다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견해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정철학자들에게 고전은 객관적 불멸이다. 

온고지신 학이시습의 의미

그래서 예수는 유대교 전통에서 결코 벗어난 말을 하지 않았고 붓다 역시 인도의 과거 전통을 떠나 불법을 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은 새 것이었고 과거가 하지 못하던 업적을 이루어 내었다. 공자의 온고지신과 학이시습은 모두 화이트헤드의 인식론과 멀지 않는 것이다. ‘학이시습’함으로 과거의 지식은 늘 새롭게 재해석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과거가 현재 속에 엄연한 사실로 재해석되어 역사를 변혁시킨 예가 서양의 르네쌍스이다. 그리스 고전을 다시 읽다가 문예부흥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화성인이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문명사를 그렇게 변혁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물론 그러할 것이다. 다음으로 6세기 중국 불교의 경우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고전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중국 불교가 탄생한다. 이를 ‘격의불교’라고 한다. 인도 고전이 중국으로 번역될 때에 중국의 도가 사상의 시각에서 번역을 하여 이미 그것은 인도 것도 아니고 중국 것도 아닌 재삼의 새로운 불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북아 대승불교의 전통이 아닌가.

화이트헤드의 ‘엄연한 사실’은 과거 경험이 객관적 불멸로 축적되면서 동시에 현재 겪는 경험과 간섭하여 새롭게 재삼의 경험으로 창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은 인류 문명사의 객관적 불멸이며 그것이 현재 속에서 엄연한 사실로 재탄생 하여야 한다. 이것이 공자의 온고지신 학이시습의 의미일 것이고 격의 불교와 문예부흥을 가능케 한 고전의 진정한 힘일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는 어느 것이 진정한 의미의 고전이냐에 관한 얘기는 않기로 한다. 다만 고전이 갖는 철학적 의미 그것도 인식론적 관점에 국한하여 말해 두려 한다.

필자는 동서비교철학을 전공하면서 많은 고전들을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을 수행해왔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저서로 ‘원효의 판비량론’, ‘수운과 화이트헤드’, ‘동학과 신서학’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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