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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비평 특집: (2)서양고전 읽기
고전비평 특집: (2)서양고전 읽기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04.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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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론적 독서 탈피하기...교양적 비평 돼야

고전도 보는 사람이나 시대에 따라 그 가치측량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스탠포드대 교수이자 비교문학사가인 프랑코 모레티는 ‘근대의 서사시’(새물결 刊)에서 ‘파우스트’, ‘율리시즈’, ‘백년의 고독’ 같은 근대의 걸작 소설들에게 ‘서사시’라는 불명예를 안겨줬다. 모레티는 이들에게서 ‘완성의 결정체’를 추출해내지 않고, “세계를 향한 수사학적 실험”의 도가니라고 말한다. 그에 의해 고전들은 통시대적 가치의 담지자가 아닌 지극히 국지적인 관념과 문체적 조작물로 위치가 재조정됐다.

가능성의 텅빈 중심에서 읽다
서구 비평계에서 ‘고전’에 대한 도전적 비평들은 계속 시도돼 왔다. 포스트모던 비평들이 문자, 남성, 백인, 기독교, 부르주아 중심의 질서에 저항해왔고 데리다의 ‘그로마톨로지’나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그것의 성공적 사례다. 하지만 이런 거시적 작업들은 요즘 그 효과의 ‘제로지점’을 지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렇게 많은 공세가 있었건만 고전들은 녹슬지 않고 살아있었던 것이다. 아니 고전에 대한 불만은 그와 같은 방식의 비판을 통해서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이 더 적당한 말일까.

여기서 고전에 대한 비판이 고전에 대하여 ‘가치론적’ 사유를 행하고 있다는 점은 눈길을 끈다. 가치의 담지자로서 고전을 대하는 것은 비평가로 하여금 고전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서 끝모를 미로를 헤매게 만든다. 가령 데리다나 들뢰즈의 방식이 그와 동떨어진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에게 다소 과도한 것으로 비치는 것도 결국은 고전을 대하는 명백한 이데올로기적 태도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라타니 고진의 방식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산 刊)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사적유물론 같은 외재적인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그것을 확인하려고 ‘자본론’을 읽는다. 그것은 진정한 읽기가 아니다”라고 말이다. “작품 이외의 어떠한 철학이나 작자의 의도도 전제하지 않고 읽는 것, 이것이 읽는 것이다”라고 그는 덧붙인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 게 아니라 고전에게 어떤 사유의 원형을 내놓으라고 독촉하는 꼴이라는 지적이다. 이런 독서는 현대사상가들에 대한 독서에도 그대로 이월된다. 들뢰즈에 대해서는 ‘유목적 사유’를, 베르그손에 대해서는 ‘지속되는 기억’을 찾아내려는 식으로 말이다. 가치론적 사유의 양 극단에서 고전에 대한 비평적 읽기는 맹목적인 비판과 굴종으로 메말라간다.

고전에 대한 비평은 오히려 텅 빈 가능성의 중심에서 텍스트를 읽는 것에서 비롯될 수 있다고 고진은 말한다. 볼테르의 ‘관용론’에서 ‘관용’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관용을 잃은 종교적 광기의 시대를 향한 독설이지, 철학적 진리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방황을 털어놓는 루소의 ‘고백록’이나 인간의 ‘이성’이 심장 안에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데카르트의 저작들은 읽는 이에게 풋풋한 웃음을 선사할 정도다. 그 인상을 수용하고 그 인상대로 솔직한 감상문을 적는 것이 고전비평의 한 출발이 되지 않을까.

송무 경상대 교수(영문학)는 “고전의 세계이해 방식을 통해 현재의 불투명성을 이해하려는 것”의 위험함을 지적한 바 있다. 프랭크 커모드가 말했듯 “고전을 읽으며 과거의 에피스테메를 아무리 섬세하게 재구축한다고 해도 우리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계에도 문화계에도 “과거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만발한데, 여기서 읽혀지는 것은 이 시대를 문화적 합의의 붕괴나 공동이해의 상실로 파악하는 부정적인 태도다. 고전비평은 이런 상고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적 감각 위에 기반할 때 색깔이 살아난다. 칸트와 헤겔 같은 독일 관념론에 대한 숭배, 그리스적 민주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호출, 신화의 상품화 속에서 주입되는 반합리주의적 세계인식에 대한 비평이 그런 것이다.

이런 감각들이 고전에 대한 연구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야 하는데,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서양근대철학회가 지은 ‘서양근대철학의 열가지 쟁점’(창비 刊)은 한국적이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근대의 고전’들을 읽고자 한 시도이다. 가령 라이프니츠의 항목에서 ‘모나드론’이 자유의지가 가능한 존재론인지, 아니면 예정조화설을 배경으로 한 결정론인지에 대한 쟁점이 형성돼 있다. 하지만 이 쟁점은 한국철학자들 사이에서 성립된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라이프니츠 학계에서 유명한 논쟁거리이다. 따라서 한국적이고 주체적인 입장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김재홍 박사(서양고대철학)는 고전연구자로서 “우리에게 전승되는 서양 고전자료의 불완전성과 전승과정의 공백기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들의 철학을 재구성해내기는 힘들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고전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와 철학적 탐구부터 먼저 구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고전을 역사적·합리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이런 ‘理解主義’는 고전에 흔들리지 않는 지위를 부여하고, 고전들의 연쇄에 대한 기성적 관념을 고통스럽게 재현해내는 데에서 그 가치를 부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만,고전연구의 전체적인 성격으로 규정될 수는 없을 것이다.

보편적 쟁점 따라가선 비평 힘들어
따라서 고전비평은 고전연구에 비평적 지위를 부여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현재 고전들에 대한 비평적 접근은 서평과 논문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대가들에 의한 단행본 저술로는 극히 드물다. 고전 재해석은 내공있는 학자의 오랜 작업으로 가능하다는  인식은 기본적으로 맞지만, 고전연구를 끊임없이 미래로 밀어내는 ‘핑계’로 기능하기도 한다. 고전에 대한 서평은 현재 번역에 대한 문제제기와 고전의 학문사적 의미에 대한 서술 사이를 오가는 수준이다. 현재적 관점에서의 고전에 대한 재평가는 드물다.

교수신문에서 지난 2002년부터 1년간 진행한 ‘우리시대의 고전’이라는 기획연재는 동시대에 넓게 읽히는 국내외 고전들을 선정해서 그것이 왜, 어떻게 고전이 됐고, 현재적 가치는 무엇인지를 따져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서평이 상당히 전문가적인 수준에서 그 책이 전시대의 인식이나 학문과 구별되는 돌출점을 짚어내는 객관적 서술로 일관했다는 느낌이 든다. 가령 노드롭 프라이의 ‘비평의 해부’나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각각 구조주의에 문학의 풍부함을 가뒀다는 비판과 남성중심적 서술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고 언급한다. ‘서양미술사’에 대한 서평자는 곰브리치에 대한 비판은 “자연인에 대한 너무 많은 요구”라고 옹호하고 있는데 이런 내용으로는 고전에 대한 평가를 했다고 할 수 없다.

학술서평보다 폭넓은 차원에서 검토
‘비평의 해부’에 대한 서평자도 프레드릭 제임슨의 견해를 빌어서 프라이가 여타 구조주의자들과 다른 유물론적 내용을 갖춘 이론가라고 그 책의 고전적 가치를 옹호할 뿐이다. 하지만 서평자의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입장은 드러나지 않는데, 그것은 고전을 그것의 학문사적 맥락에서만 읽어내려는 소극적 독서방식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소극성에 대한 답답함은 ‘인물과사상’ 5월호에서 서울대 고전 1백選에 대해 “그런 책들을 고전이라고 뽑았나”라고 비판하고 이를 36권으로 탈구축한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의 고전선정의 기준과 방식에 눈길을 돌리게 만든다.

고전에 대해서 “전문가들도 잘 읽지 않는 어려운 책이 아니라, 긴 시대에 걸쳐서 넓게 향유되고 감동을 준 책”이라는 기준을 사용해서 정의하는 부분도 논쟁적이긴 하지만 합리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셰익스피어가 당대의 TV드라마 같은 것이었다는 박 교수의 주장에서 볼 수 있듯, 고전은 장기지속적인 삶의 주제나 가치를 어떤 식으로든 향유케 만드는 힘을 가진 텍스트로 규정하는 것이 합당해보이기 때문이다. ‘페더랄리스트 페이퍼’라는 미국 헌법관련 서적, ‘괴델, 에셔, 바흐’, ‘이기적 유전자’, ‘수학의 확실성’ 같은 책을 선정한 교수들에 대해 “과연 보편적인 교양을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하는 그의 비판은 새겨들을 만하다. 서양고전비평은 고전에 대한 보편적인 교양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전비평은 전문영역에서 전문가적인 수준으로 진행된 고전에 대한 코멘터리를 좀더 보편적 차원 메타비평의 대상으로 만들어가면서 그 성격이 획득된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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