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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종속될 때, 예술은 반드시 타락한다"
"정치에 종속될 때, 예술은 반드시 타락한다"
  • 박홍규 영남대
  • 승인 2005.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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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비평: 역사 속에서 살펴본 정치와 예술

최근 공연된 창작오페라 ‘아 고구려 고구려-광개토호대왕’은 극은 실종되고 영웅을 찬양할 뿐인 축전 오페라로 전락한 것이라고 평론가 이용숙이 평한 것은 옳았다. 그런 오페라가 쓰여지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음악가들이 그 유사한 서양 오페라에 젖어 있기 때문이리라. 이용숙은 베르디의 경우 “영웅을 찬양해도 영웅을 파멸로 이끄는 운명이나 상황의 극적 설득력으로 인해 감동을 준다”고 하나, 베르디는 물론 대부분의 서양 오페라 작곡가들도 영웅주의, 국가주의, 심지어 제국주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흔히 음악을 가장 비정치적인 예술이라고 하나, 오페라를 비롯해 음악은 처음부터 철저히 왕족이나 귀족계급에 종속되었고, 19세기에 그런 지배계급의 종속으로부터는 벗어나도 부르주아 중심의 제국주의나 자본주의에 종속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때늦은 오페라 붐이 생기는 것도 오페라의 본질적인 정치적 계급적 종속성과 무관하지 않을지 모른다.

오페라만이 아니다. 히틀러나 무솔리니 시대, 심지어 일제 시대에도 바그너는 물론이고 베토벤이나 브람스까지 대부분의 음악이 독재와 침략과 전쟁의 미화로 연주됐다. 꼭 그런 시대만이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음악은 권력의 찬송으로 울려 퍼졌다. 베토벤은 물론 모차르트도 지배자 찬양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와 시민을 위한 음악을 만들고자 했으나, 당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슈트라우스 같은 작곡가나 카라얀을 비롯한 지휘자들은 나치에 직접 봉사했다. 심지어 무용조차 그러했다. 근대발레를 시작하게 한 루이 14세가 발레를 권력확보에 이용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현대에도 나치시대를 풍미한 마리 위그만을 비롯한 표현주의 무용도 정치적 어용이라는 혐의를 벗어나기 어렵다. 물론 음악에나 발레에도 정치에 종속되지 않은 예외는 있으나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우리의 전통음악이라는 국악이나 한국무용은 축전예술이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세계 방방곡곡의 미술관에 걸린 작품 대부분도 ‘영웅과 미녀’, ‘전쟁과 침략’을 미화한다. 앙그르의 나폴레옹 찬양화를 예로 들 것도 없이 그런 것들로 서양미술관은 만원이다. 앙그르의 영웅예찬과 관능예찬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의 스승인 다비드가 프랑스 대혁명을 찬양한 것조차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어용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배자인 왕후와 귀족, 장군들의 저 수많은 초상화도 마찬가지이리라. 더욱 심각한 것은 전쟁과 침략의 예찬이다. 예술은 전쟁을 부추기는 것인가, 아니면 전쟁에 반대하여 평화를 그리는 것인가. ‘전쟁미술’이라는 장르는 있으나 ‘평화미술’이라는 장르는 아예 없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침략 프랑스에 대한 증오나 피침략 조국인 스페인에 대한 애정 없이 냉혹한 인간드라마로 그린 고야의 판화나 ‘1805년 연작’은 가장 정치적이면서도 정치에 종속되지 않은 정치예술의 모범이다. 그 앞에 전쟁의 비참과 불행을 그린 칼로나, 그 뒤의 도미에의 풍자화들,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비롯한 평화의 그림들, 콜비츠, 루오, 마송, 미로, 베크만, 하트필드, 그로스, 딕스 같은 화가들이 이어진다. 특히 멕시코 벽화 르네상스의 리베라, 오로스코, 시케이로스, 그리고 프리다 칼로는 그 강력한 정치적 선전성에도 불구하고 인간해방을 추구한 제3세계 미술의 모범이자 정치와 예술이 만나는 모범이 된다. 

제국주의와 함께 시작된 근대문학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정치에 종속되었다. 근대소설의 시조라고 하는 디포우의 ‘로빈슨 크루소’부터 그랬다. 그 침략의 무대가 독도라면 우리가 그것을 읽겠는가. 사실 대부분의 서양예술은 국가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이다. 가령 셰익스피어는 거의 완벽하게 제국주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이며, 국가주의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이다. 영국의 예술에서 국가주의나 제국주의라는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경우란 거의 없다. 내가 아는 극소수의 예외는 기껏 17세기의 스위프트, 18세기의 페인, 19세기의 모리스, 20세기의 오웰 정도다. 나머지는 대부분 제국주의자이거나 귀족주의자이거나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지드나 카뮈나 말로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나라 문인들이 역사상 최고로 친다는 ‘이방인’의 무대가 알제가 아닌 인천 앞 바다라면 우리는 그것을 읽겠는가.

심지어 제국의 식민지에서 쓰여진 문학이나 예술이라고 해서 당연히 반제국주의적이기는커녕 도리어 대부분 더욱 저질의 제국주의 아류라는 점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점은 일제하 또는 지금까지의 우리 예술을 바라보는 데에도 상대적인 시각을 갖게 하는 점에서 다행스러울지 모른다. 여하튼 식민지시대에 반제국주의적인 작품을 기대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보기 드문 예인 C. L. R. 제임스의 ‘흑인 자코방’과 같은 작품은 아직도 번역되어 있지 않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임꺽정’, ‘장길산’, ‘태백산맥’ 등이 있어서 다행이다. 

영화가 얼마나 정치적인가 하는 점은 세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그 제목조차 나열한 필요가 없이 대부분 미국의 국가주의, 제국주의를 반영하는 헐리우드 영화는 제쳐두더라도 우리의 그 모방들, 특히 최근 ‘쉬리’,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등의 국가주의 영화가 엄청난 대흥행을 기록한 점은 우려된다. 그것은 또 다른 국가주의의 축소판인 폭력영화의 변형인 점에서도 우려된다. 우리 영화는 조폭영화의 재판인 ‘올드 보이’를 비롯해 인권영화로 만들었다는 ‘여섯 개의 시선’까지 포함해 너무나도 비인권적인 컬트적 요소가 강하다. 그로테스크함이 한국영화의 개성이고, 그것이 한국정치현실의 반영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으나, 영화가 그런 정치현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는 점에서 의문이다.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 정치와 무관한 예술은 없다. 모든 학문이 그러하듯이 예술도 당연히 정치를 반영한다. 문제는 정치와 예술이 만나는 모습이다.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예술은 정치에 종속된 어용이었고, 정치로부터 독립된 또는 정치에 저항하는 예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 정치와 무관한 듯이 보이는 소위 순수예술도 대부분 소극적으로 정치에 종속되기 마련이다. 가령 식민시대나 독재시대에 자연이나 내면에 빠져 비정치적이라고 주장하거나 평가되어도 그 현실에 눈을 감는다는 점에서는 역시 대단히 정치적이다. 따라서 친일이나 친독재정부만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주의나 내면주의가 더욱 더 친일적이고 친 독재정부적일 수도 있다. 대중예술의 특히 그럴 수 있다.

예술이 정치와 만나는 경우 예술은 인간해방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반권력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미 낡은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경영이니 예술을 통한 국가경쟁력이니 한류니 민족성을 갖는 예술이니 하는 가운데 그런 주장은 이미 설득력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예술이 정치에 종속될 때, 예술은 반드시 타락한다. 사실 그 타락된 예술들은 대부분 더 이상 우리 눈앞에 남아 있지도 않다. 그러나 여전히 고전으로 남아 있는 예술 중에도 그런 잔재가 남아 있음을 주의하고 특히 그런 서양예술을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런 것을 무조건 모범으로 삼는 한 또 다른 영웅 찬양의 축전이라는 정치에 종속된 사이비 예술의 재판은 나오기 마련이다. 대신 정치권력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나 그것을 당당히 비판하고 인간해방을 추구하는 참된 예술을 모범으로 삼아 그런 예술을 창조해야 한다. 

박홍규 / 영남대 법학

필자는 노동법을 전공해 ‘노동법론’, ‘사회정책, 사회보장법’ 등 많은 법률관련 저서를 썼으나, 그 외에 ‘시대와 미술’, ‘내친구 빈센트’, ‘셰익스피어는 제국주의자다’ 등의 예술관련 저서도 활발히 집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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