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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일본군·러시아군으로 조선에 맞서다
조선인, 일본군·러시아군으로 조선에 맞서다
  • 유무수
  • 승인 2021.09.03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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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아리랑 민족의 디아스포라』 이혜옥 지음 | 글을읽다 | 344쪽

외부 열강세력의 야만과 내부 지도자의 부패
처참한 고난에 빠지며 방랑했던 아리랑 민족

이혜옥 저자는 역사학자이며 미국 여러 대학 도서관에서 근무했다. 그는 1904년 러·일 전쟁의 종군기자였던 잭 런던(Jack London, 1876∼1916)의 글 “일본 병사들의 제일 큰 문제는 발병이었다… 평생 짚신만 신고 다니다가 딱딱한 가죽 군화를 신어 발에 상처가 난 것이다”에서 ‘짚신’에 주목했다. 한일합방이 되기도 전에 조선인이 일본군으로 참전했던 것일까? 저자는 일본·미국·러시아·한국의 일차 자료와 미국 내 도서관에 소장된 자료를 추적했다.

1904∼1905년의 러·일 전쟁 초기에 일본은 조선인을 군속 노동자로 동원했다. 급여가 약속되었으므로 평민들은 생계유지의 기회라고 믿으며 일했고, 양반 지배층은 소득의 70% 상납을 기다렸다. 잭 런던은 조선인 군속 노동자들을 ‘흰옷 입은 짐꾼들’이라고 불렀다. 평북 강계에서는 러시아 군대가 조선인 마을을 습격하여 난동을 부렸고, 조선의 호랑이 사냥꾼이 러시아군에게 공격을 가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있었던 1907년의 기밀공문에 의하면 일본군으로 가담하여 현저한 공적을 세운 조선인에게 훈장과 현금의 포상이 있었다. 

러시아군 속에도 조선인이 있었다. 러시아 황제에 충성심을 나타내며 반일감정이 강했던 조선인이 있었고, 러시아 황군에 속해 있던 조선인은 4천 명 이상이었다. 그 외 러시아 편에서 첩보활동을 하고 게릴라 군을 조직하여 일본에 대항한 조선인도 있었다. 그들은 어디서 왔는가? 조선의 평민은 조정 권력집단의 무능과 부패, 지방관리의 탐욕, 백골징포(죽은 사람에게까지 삼베와 무명 등 세금을 받던 일) 등으로 노예의 삶에 시달렸다. 조선 땅에 사는 평민은 절망의 늪에 빠져 들어갔다. 백골징포의 폐단은 1665∼1875까지 『조선왕조실록』에도 수없이 나타난다. 국경을 넘다가 잡히면 역적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지만 희망을 향한 탈출은 계속되었다. 압록강을 넘으면 만주의 조선인, 두만강을 넘으면 러시아의 고려인이 되었다. 러시아는 그들에게 토지와 씨앗을 주며 조선의 권력층과 달리 살아갈 희망을 품게 했고, 조선인은 살아남기 위해 러시아에 충성을 표시하면서 적응했다. 러·일 전쟁당시 극동 러시아 지역에 거주한 조선인은 3만4천 명 이상이었고 1924년경 소비에트 연방에 살고 있던 고려인은 약 15만 명이었다. 이후 정치적 격변을 거치며 공산당의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고려인 엘리트 2천5백 명을 처형하고 17만 명 이상의 고려인을 미지의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열악한 이주과정에서 16.3%가 절망하며 죽었다.

1870년에는 28개의 조선인 마을이 압록강변에 밀집해 있었다. 1881년에는 1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연변 지역에 살았다. 청-일 전쟁 이후 이주민이 급증했으며 1897년에는 3만7천 명이 압록강 북쪽에 살고 있었다. 그곳에는 조선 땅에 없는 희망이 있었다. 이주와 정착이 계속 늘어 1931년에는 62만9천 명이 만주에 살고 있었다. 김산은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에 협력한 항일혁명가였으나 일본스파이라는 의심을 받고 사형을 당했다. 중국의 공산혁명 속에서도 살아남은 중국내 조선인들 중 8만 명 이상이 1950년의 한국전쟁에서 중공인민군부대로 투입됐다. 

‘외부 제국주의 야만’과 ‘국내 권력자들의 애국적인 책임의식의 부재와 혁신적인 지성의 결핍’이 겹칠 때 백성은 처참한 고난에 빠진다.

유무수 객원기자 wiseta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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