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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지 못한 안과 밖의 틀, 지역개념 외면
바꾸지 못한 안과 밖의 틀, 지역개념 외면
  • 이일영 한신대
  • 승인 2005.04.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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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한국의 농업정책, 틀을 바꾸자』(성진근 외 지음, 삼성경제연구소 刊)

농업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일은 참 어렵다. 그런데 ‘한국의 농업정책, 틀을 바꾸자’는 제목부터 야심적이다. 필자들이 한국 농업경제학계를 대표하는 일급 전문가들이고 그들이 “틀을 바꾸자”고 했으니 자연히 큰 기대가 생긴다. 게다가 근래 ‘지식 패권’으로 떠오르고 있고 ‘대한민국 경제수비대’를 자부한다는 연구소 기업의 농업문제에 대한 관심에도 또 관심이 가게 된다.

저자들에 의하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문제의식은 정부 농업정책에 대한 해설서적인 사명에 충실했던 기존 농업정책학 관련도서의 한계를 뛰어넘자는 것이다. 현실에 무감각하고 틀에 박힌 교과서 때문에 이리저리 방황했던 학창시절을 생각하면, 확실히 이러한 문제의식은 고마운 것이다. 이 책 역시 상당 부분은 ‘교과서’적이나, 제목에서 앞세운 ‘틀을 바꾸자’는 현실인식과 주장은 곳곳에서 강조되고 있다.

저자들은 강렬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고율관세가 점차 낮아지고 감축대상 국내보조금이 연차적으로 줄어가는 동안 그럭저럭 지내다가 ‘좋았던 옛날 시절’을 회상하면서 사라지게 될 것인가? 아니면 시장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구도로 밑그림을 다시 그리고 농업회생의 길을 개척해나갈 것인가?” 그리고는 ‘시장원리’를 강조하는 농업정책의 틀로의 전환을 주장한다. 과감한 전환을 위해서, 첫째, 자본중심 농법으로의 전환, 가공ㆍ유통서비스 차별화를 통한 경쟁력 향상, 둘째, 가격지지정책을 대체해 소득보전 정책수단과 위험관리시스템 강화, 셋째, 농촌의 쾌적성과 정주성을 강화하기 위해 도농통합 광역생활권 구축, 넷째, 민간의 시장원리를 존중하고 정부와 시장의 역할을 적절히 분담 등의 정책수단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들 역시 농업경제학계의 일원인지라 또한 농업의 특수성을 ‘잘’ 배려하고 있다. 그래서 새롭게 주장하는 패러다임의 핵심은 “한국농업을 시장원리에 적합한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가되 시장실패가 예상되는 부분은 정책으로 보완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농업은 자본과 지식산업에서 발전 잠재력을 찾아야”하지만, “현실적으로 농업 내부에 축적된 자본이 없으므로 상당기간 동안 정부가 재정투융자를 지속해야 한다.” 또 농업내부에 경영과 기술능력이 부족하므로, “정부는 유능한 인력을 농촌으로 불러들이는 시장신호를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저자들은 농업경제학계 내부의 일방적 개방반대론으로부터 새로운 전환을 주장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논적을, 과거의 패러다임을 구체적으로 논란하지 않음으로써,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체도 불분명해졌다. 개방반대론의 경우에도, 시장지향적인 경제질서를 근본적으로 반대하지 않으며, 다만 국민경제에 필요한 최소한의 농업규모의 필요성을 이야기할 것이다. 한편 개방론, 또는 개방불가피론에서는 정책개입의 범위가 여전히 넓게 설정되어 있고, 정부실패가 반복될 것이라는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낡은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은 얼마나 다른 것인가. 무엇을 바꾼다는 것인가.

개방론과 개방반대론 양 쪽에서 모두 이 책을 그다지 새롭지 않다고 할 가능성이 많다. 스스로 어느 쪽에도 속해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논평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한다. 개방론과 개방반대론 모두 ‘국경’을 단위로 사고하는 패러다임을 공유하고 있고, 이 책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라고. 

핵심적인 것은 개방문제에 대한 인식이다. 저자들은 “세계화는 세계 각국이 하나의 지역사회처럼 통합되고 동화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지난 십여년간 농업분야는 세계시장 통합의 영향을 가장 강력하게 받은 분야의 하나이고, 그러므로 농업에 있어서 “UR 농업협상은 혁명과도 같은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논평자는 세계화가 돌연히 출현한 현상도 아니고 또 통합ㆍ보편주의ㆍ수렴 등의 개념으로 단순화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글로벌화는 위계와 불균질성의 가능성과 공존하며, 단일하고 조화로운 세계시장의 전 단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글로벌화는 지역화과정과 서로 교차하면서 서로를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대서양 중심의 비대칭성이 대단히 강하지만, 그 정도는 20세기 전반에 비하면 감소하고 있다. 정부 기능은 보다 확대되고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거버넌스의 범위는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국경개념을 넘어 새로운 변경으로 확대되고 있다. 

개방론자들, 개방반대론자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들 모두 개방과 글로벌화의 문제를 국경의 상대적 높이로만 인식한다. ‘안과 밖’이 있을 뿐이다. 한국농업과 세계농업, 국내시장과 세계시장만이 시야에 있다. 그래서 중국 농업은 ‘밖’의 문제로, 북한 농업은 ‘안’의 문제로 간단히 구획되고, 형성 중인 동북아지역의 식료시스템 문제는 아예 거론되지도 않는다.

틀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렵다. 논평자는 우선 틀을 ‘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국경과 산업의 경계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더하자는 것이다. ‘지역’이라는 개념을 더 중시해야 한다. 국경을 가로지르면서 형성되는 지역, 국경 아래로 내려뻗는 지역에서 다양한 지역특수(region-specific) 요소가 형성되는 데 주목해야 한다. ‘농업’도 더 세분화하여 정의해야 하고, 위험ㆍ안전, 생태환경 등 문제들이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재영토화 된 다차원의 지역과 산업이 형성됨에 따라,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체계, 학문분과의 존재형태, 운동의 방식도 재구성되어야 한다. 틀을 ‘더해’ 가다 보면 기존의 틀, 농업정책, 농업경제학으로부터의 ‘탈피’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일영 / 한신대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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