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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논평] 문화다양성협약과 한국의 선택
[교수논평] 문화다양성협약과 한국의 선택
  • 이해영 한신대
  • 승인 2005.04.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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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0월로 예정된 유네스코총회에서 ‘문화컨텐츠와 예술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 협약’ 흔히 ‘문화다양성협약’으로 불리는 새로운 국제협약이 채택될 예정이다. 알려진 것처럼 세계화의 결과, 방송프로그램을 비롯 세계영상산업의 약 85%를 할리우드가 독점하는 ‘이미지의 대량학살(genocide)’이 초래되었다. 소수민족 언어는 거의 말살될 위기에 처하고, 또 대부분 나라에서 문화의 ‘맥도날드화’가 광범위하게 진행됐다. 이러한 전 지구적 문화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해 문화적 종다양성을 보호하기 위한 국제협약이 제안돼 마침내 올해 그 최종적 채택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나라에 문화주권을 방어하기 위한 자율적 정책 공간을 제시할 새로운 준거 틀을 제시하자는 것이 본 협약의 핵심취지이다.

처음 정부간기구인 ‘국제문화부장관회의(INCP)'에서 제안돼 수차례의 전문가회의를 거쳐 현재 유네스코 차원에서 이미 2차례의 정부간회의를 거친 상태이며 5월말의 3차 정부간회의를 앞두고 있다. 그런데 그 취지와 목적에 비추어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 협약을 앞두고 국제 문화전쟁이 치열하다. 본디 국제사회란 것이 그 본질상 무정부상태인 탓에 헌법과 같은 최고심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새로운 국제협약이나 조약을 체결할 경우 기존 협약과 조약과의 지위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이 지위문제에 관련된 조항을 조약문안에 별도로 마련한다. 그것을 흔히 관계조항이라 부르는데 문화다양성협약의 경우 19조가 여기에 해당된다.

쟁점은 아주 단순하다. 문화다양성 보호와 통상촉진, 문화(정책)와 통상(정책)이 충돌할 경우 어느 것이 우선하는가. 이 다분히 ‘고전적인’ 쟁점을 배경으로 하면서 한편으로 미국, 호주, 일본 등과 다른 한편으로 EU, 캐나다, 남아공, 중국, 인도 등을 비롯한 대다수 개도국간의 한판 결전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19조는 특이하게도 합의안을 도출하지 못한 채, 옵션 A와 B 두 가지를 만들어 각국 정부로 하여금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옵션 B의 내용은 문화협약이 기존의 협약상 권리, 의무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 다는 것이고, 반면 옵션 A는 기존 국제협약의 이행이 문화다양성에 “심각한 손상 혹은 위협”이 될 경우 각국은 정해진 구제절차를 밟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옵션 B는 말하자면 그렇고 그런 괜찮은 세계문화인 선언문 정도를 만들자는 것이며, 옵션 A는 최소한의 강제성을 구비하고 있는 안이다. 미국, 호주 진영이 옵션 B를 지지하고 있음은 불문가지라 할 것이다. 바로 이 협약을 저지하기 위해 80년대 초에 탈퇴한 유네스코에 재가입한 소동을 벌인 미국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지난 2월의 정부간 회의에서도 치열한 의사진행방해 전술을 구사한 바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정부의 입장은 무엇일까. 작년 말 외교통상부는 당연 B를 지지하고, 문화관광부는 A에 대한 ‘약한지지’ 의사를 표명해 그 결과 ‘입장 유보’ 곧 입장 없음이 입장이다. 물론 문화관광부측에서는 국익을 고려해 제3안 가능성도 언급한다. 그래서 나는 문광부가 ‘부디 제발’ 3안을 지지해 주길 바란다. 아주 좋은 3안이 이미 나와 있다. 지난 2월 회의 말미 EU가 비공식적으로 회람시킨 안이 그것이다. 아주 정교하게 설계된 EU의 3안에 따르면 문화협정과 통상협정이 상호 종속되지 아니하며, 그 상호보완성이라는 취지에서, 핵심상 WTO 등 통상협정을 의미하는 기타 국제협정의 해석, 적용에 있어 체약국은 문화협정을 존중하고 문화다양성을 보호 증진해야 함을 규정하고 있다. 

물론 이 3안조차도 5월 말의 3차 회의를 거쳐야 그 윤곽이 분명해 질 것 같고, 나아가 EU와 미국간의 지루하고도 치열한 각축을 거친 다음에야 최종안이 나올 전망이다. 물론 개도국을 비롯한 일각에서는 합의가 안 되면 투표로 갈 것을 촉구하고 있지만 미국 또한 만만치가 않은 형국이다. 이미 GATS(서비스교역협정)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선례를 갖고 있는 우리 정부 역시, 보기에 민망한 ‘국제적 복지부동’을 그만두고 적극적, 공세적 문화외교로 전환해 주기를 기대하고 또 촉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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