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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복제 시대의 '노동가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디지털복제 시대의 '노동가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
  • 류동민 충남대
  • 승인 2005.04.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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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_‘진보평론’의 정보재의 가치논쟁에 대하여

 

최근 ‘진보평론’ 지상에서 정보재의 가치를 둘러싼 논쟁이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되고 있다. 이론경제학적 주제의 대중적 논쟁이 거의 전무한 실정을 감안할 때,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발단은 2004년 여름호에 실린 채만수의 글(‘과학기술혁명과 상품의 가치.가격’)이다. 이 글에는 필자를 포함한 몇몇 논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포함되어 있지만, 역시 논쟁의 주된 대상은 강남훈의 ‘정보혁명의 정치경제학’(문화과학사 刊, 2002)이다.

애초에 강남훈의 출발점은 이른바 디지털 혁명의 진전에도 노동가치론은 여전히 타당한가라는 문제제기에 놓여 있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노동가치론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인간의 노동만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예컨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윈도우 같은 소프트웨어의 경우, 최초에 연구개발을 위해서는 많은 노동이 필요하지만, 일단 개발되고 나면 추가로 생산하는 데에는 노동이 거의 들지 않는다. 심지어 개인의 경우에도, 그저 몇 백 원짜리 공 CD 한 장에 약간의 시간만 들이면 손쉽게 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윈도우 CD에는 노동량이 특히 초기비용에 비한다면 무시해도 좋을 수준밖에 들어 있지 않으므로 그 가치는 ‘0’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미 오래전 고전학파 경제학자인 리카도가 노동가치론의 예외로 간주했던 오래된 포도주나 토지처럼 노동투입량이 0인 재화는 있었다. 그러나, 텍스트, 음악, 영상, 기타 거의 모든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 디지털화하고 있는 정보혁명의 시대에는 더 이상 이러한 현상을 예외라 치부하기는 어렵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 물음에 대해 강남훈이 준비한 답변은 예컨대 윈도우 CD 한 장의 가치는 0인 듯이 보이지만, 윈도우 2000 버전 전체의 가치는 결코 0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즉, 그는 정보상품의 단위를 카피(copy)가 아니라 버전(version)으로 이해하면, 노동가치론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주장을 편다. 버전 전체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이 해당 버전의 총판매량(카피수)에 나누어 실현되는 것으로 보면 된다는 주장이다. 아울러 그는 정보상품의 이윤이 지대/특별잉여가치/독점이윤이라는 세 가지 구성부분으로 이루어지며 그들간의 동태적인 상호작용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이에 대한 채만수의 비판은 강남훈이 ‘반론’(진보평론, 2004년 가을호)에서 요약한 바와 같이, 첫째, 정보재는 카피 자체를 상품의 단위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가치를 갖지 않는다, 둘째, 토지에만 적용되어야 하는 지대 개념을 정보재에 적용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 등이다. 이 밖에 정보재의 등장이 경제의 생산성이나 이윤율을 높인다는 이른바 ‘신경제’현상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도 추가된다. 이후의 논쟁과정에서 마지막 부분은 별로 주목되지 않은 듯하며, 실제로도 그것은 노동가치론에 대한 이론적 논쟁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실증적 검토를 필요로 하는 쟁점이다. 그렇다면, 결국 강남훈과 채만수의 대립점은 정보재의 가치결정과 관련된 두 가지 논점으로 압축된다. 기본적으로 채만수의 편에 서 있는 이경천의 ‘정보재 단위인 알고리즘, 그 가치 및 가격의 문제’(진보평론 ,2004년 겨울호)도 이러한 두 가지 논점에서 강남훈과 대립각을 세운다.

그런데, 두 번째 논점, 즉 토지소유와 무관한 정보재에 지대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채만수)은 맑스의 ‘자본론’ 만을 통해 경제학을 공부한 이들이 경제학적 개념에 낯선 나머지 흔히 범하는 실수 중의 하나로서 일종의 해프닝 같은 것이다. 맑스의 지대개념과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밝혀보라는 주문(이경천)은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 요구이지만, 여전히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원전에서 찾아보려는 태도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한편, 첫 번째 논점, 즉 정보재의 가치결정단위에 대해 버전이 아니라 알고리즘이라는 주장(이경천)은 일단 통상 제기되는 물음처럼 카피 단위로 가치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므로, 버전과 알고리즘의 차이에 대한 다소 기술적인 논의가 필요할 뿐 그 함의에 있어서는 강남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채만수와 이경천의 공통적인 주장은 결국 정보재의 가격은 독점가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가치는 0이지만 독점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가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이는 단지 이경천에 비해 채만수가 갖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확신의 정도가 훨씬 크다는 것뿐이다. 실상 채만수의 주장은 오래전 무인자동화를 둘러싼 논쟁에서 정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이 취했던 입장과 유사하다. 즉, 정보기술의 발전은 가치를 0으로 만들지만 독점가격에 의해 높은 이윤이 발생하며, 결국 양자 간의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이 자본주의사회를 지양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강남훈처럼 지대, 특별잉여가치, 독점가격 등의 여러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절충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보재의 가치를 노동만으로 설명하거나 아니면 독점력에 따른 수탈의 결과로만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이러한 입장에서는 두 가지 중의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즉 정보재에 노동량이 들어가는 것도, 들어가지 않는 것도 모두 노동가치론이 옳음을 입증하는 근거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결국 이러한 관점에서 필요한 것은, 채만수 글의 마지막 단락에서처럼, 그저 기독교도들이 사도신경을 외듯이 ‘인류역사의 발전법칙’에 관한 맑스의 텍스트를 암송하는 것뿐이다.

가장 최근의 글(진보평론, 2005년 봄호)에서 박성수는 강남훈에 대해 유보적 지지의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 가치론적 층위의 설명과 현실의 인상을 함께 섞어 놓는, 다시 말해 추상과 구체를 혼동하는 잘못을 비판하는 그의 논의는 특히 디지털혁명에 관한 논의들이 몇 가지 인상비평으로 분석을 대신하는 경향에 대한 적절한 지적이다. 그렇지만, 정보재의 가치를 노동가치론에 기초하여 설명하는 문제는 여전히 추구돼야 할 문제다. 현대 학문의 고도의 발전에 따른 분과화 경향은 경제학에서 특히 심하고 노동가치론은 분명 경제학의 한 분야이건만, 그것은 철학에서 사회학, 수학, 언어학에 이르는 다양한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만나는 지점이다. 이처럼 학제적 분야로서의 매력은 훌륭한 장점이지만, 동시에 아마추어리즘을 극복하면서 논의의 실질적 진전을 이루어내어야 한다는 과제를 던지기도 한다. 이번 논쟁이 이러한 계기가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류동민 / 충남대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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