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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에 아홉은 '맨손' 연구"
"열에 아홉은 '맨손' 연구"
  • 정진수 충북대
  • 승인 2005.04.06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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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 건강한 학문적 생태계를 위해

정진수 / 충북대·물리학

요즘 정부는 특정분야만 집중 지원하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화두에 매달려 있다. 국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 하는데, 알고 보면 당장 돈을 벌어들이는 기술만 대접하겠다는 이야기다. 선비의 나라가 어찌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 경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 때문에 기초 과학은 찬밥 신세다.


많은 사람이 기초과학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고, 돈을 벌지 못한다고 알고 있다. 발전기의 원리를 알아낸 패러데이도, 그 원리가 어디에 쓰일 것이냐는 질문에 “어디에 쓰일지는 모르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지식이 만들어 내는 전기가 없이 사는 삶을 상상해 보라. 하루하루가 얼마나 불편할까. 20세기의 찬란한 문명을 만든 것도 기초과학이었다. 반도체, 레이저, 트랜지스터, 원자력 등 물리학이 찾아낸 기술은 요즈음 국가의 부를 좌우한다. 패러데이 시대에는 기초과학이 알아낸 지식이 돈 버는 기술로 발전하기 위해서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그 시간이 몇 년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게놈을 알아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미 변형 유전자에 대해 걱정하고 있지 않은가.


정부가 특별히 육성하겠다는 소위 ‘10대 성장동력기술’은 모두 응용과학뿐이다. 산자부나 과기부 입장에서는 당장 돈을 벌어야 하니 그래야 할지도 모르겠으나, 너무 근시안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기초과학을 그나마 지원하는 곳은 교육부밖에 없는데, 그 충분치 않은 지원도 Brian Korea다 지역대학혁신역량강화다 해서 몇 천억원의 돈을 몇 군데 대학에만 집중적으로 지원한다. 이러다보니 기초과학 중에서 집중지원을 받지 못하는 분야는 교육부 산하 학술진흥재단의 연구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 재단의 연구비 선정 비율이 8:1 정도다. 이중으로 연구비를 받는 연구자도 있으니, 연구를 하고 싶은 사람 열 중 아홉은 기초적인 연구비조차 없다는 말이다. 몇 번 연구비를 신청했다가 선정률이 낮아 신청을 포기한 사람을 제외하고서도 말이다.


정부는 진화론에서 배울 것이 있다. 생태계를 포함해서, 학계나 사회 그리고 국가 경쟁력도, 환경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려면 다양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니 당장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분야만 우성인자라고 생각하고 지원하고 있다. 우성만 있는 생태계는 건강하지 못하다. 환경이 변하면 더 이상 우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환경이 변할 때, 다양한 유전자를 가진 건강한 생태계는 살아남지만, 그렇지 않으면 멸종하고 만다. 기술의 환경도 변하므로 다양한 기술과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새로운 기술을 기초과학이 찾아내는 새로운 지식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당장 돈 버는 분야만 키우고, 나머지는 고사시키고 있다.


말로만 ‘선진국’, ‘국민소득 이만불’을 암만 외쳐도 소용없다. 우리나라의 기술력이 튼튼해야 가능한 일이다. 새로운 기술은 항상 기초과학에서 시작했다. 언제 어떤 지식이 기술로 발전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다양한 대비책을 세우고 있어야한다. 그런데 정부는 돈 버는 기술에 집중하겠다는 이야기만 한다. 단 기간에 돈을 벌 수 있는 기술은 정부에서 도와주지 않아도 기업에서 열심히 개발한다. 돈 버는 일은 정부보다 기업이 훨씬 잘한다. 국가를 책임지고 있는 정부는 보다 긴 안목을 가지고 미래의 환경 변화에 대비해야할 것이다.


산자부건, 과기부건, 교육부건, 다양한 유전자를 계속 유지하여 건강한 학문적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정책이 하나라도 발표되면 정말 좋겠다. 내가 기초과학에 몸담고 있어서가 아니라, 내 자식이 살아갈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그런 예를 보지 못했다. 지난 10년간 내가 본 것은 모두 거꾸로만 가고 있었다.


사모아 섬에서 거대한 유전이 발견되었다고 하자. 마가렛 미드 같은 인류학자가 우리에게 있다면, 협상에 얼마나 유리할까. 황우석 교수가 유명하지 않던 시절에 계속적인 연구를 할 수 없었다면, 배아복제를 연구할 수 있는 기초 기술이 개발되는 환경의 변화가 없었다면, 과연 성공할 수 있었을까. 지금도 십 년 후에 기술로 발전할 수 있는 지식을 찾고 있는 사람들은 많다. 다만 환경 때문에 사라지고 있을 뿐이다.


작년 11월 KBS 스페셜 ‘도자기’라는 5부작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일본이 우리나라의 도공을 모조리 잡아가 버렸다고 한다. 도자기 만드는 기술은 당시의 세계(주로 유럽)를 상대로 돈을 버는 최첨단 기술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세계를 상대로 돈을 벌었고, 도공의 씨가 말라버린 우리나라의 도자기 기술은 맥이 끊어졌다. 일본이 독도에 시선만 돌려도 난리를 치는 요즈음, 가지고 있는 지식과 기술을 스스로 말살하고 있다. 후손한테 무어라고 변명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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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명 2005-04-07 02:54:51
저는 공학(기계공학)분야에 종사합니다만 정교수님의
의견에 공감하며 적극 지지합니다.
최근 수년간 시행된 사회전반적인 제도가 합리성을 지향하며
발전적 개혁이 시도되어온 긍정적인측면도 있지만 실제로는
아직도 주요한 정책결정시 너무 정치 논리나 표를 의식한
근시안적인 요소가 개입되는 경우도 적지 않아 진실로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애국적 리더쉽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
공학 분야는 그렇다 치더라도 기초과학 분야는 장기적으로
산업발전의 기간 산업과 같은 역할을 하므로 꾸준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공학분야 연구비 투자조차도 균형적인 발전의 토양아래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데 분야별로 어떤 분야는 얼어서 동사해가는
동안 다른 분야는 지나치게 뜨거워 효율 분산이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