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02:15 (금)
'한일공동역사교과서' 만든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들
'한일공동역사교과서' 만든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들
  • 이민선 기자
  • 승인 2005.04.0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7년간 15번 만나서 토론…'중화질서'에서 큰 의견차

생채기로 가득한 한일 관계를 뛰어 넘어 ‘편견’없는 역사를 공유하는 일은 진정 불가능한 일인가. 한국과 일본의 젊은 세대에게 史實의 왜곡 없이 서로의 역사를 알려줘,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할 수는 없을까.

한일관계가 한겨울을 연상할 만큼 경색된 상황에서 이러한 불가능한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들이 그 주인공들. 일본의 역사전공 교수들과 역사교사들과 함께 한일의 고등학생들이 볼 수 있는 한일관계사 부교재를 출판하기로 했다.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들이 한일공동역사교과서 작업에 뛰어든 시점은 8년 전. 1997년 일본의 가쿠게이(學藝)대 교수와 일본 역사교사들과 함께 심포지엄을 연 게 공동역사교과서 작업의 시발점이 됐다. 처음에는 한일간의 역사인식의 차이를 좁히자는 목적으로 만남을 가졌지만, 1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서 공동으로 역사교과서를 써보자는 이야기가 솔솔 나와 1998년부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교과서를 만들기 위한 의견 조정 작업은 1998년부터 올 1월까지 모두 15차례가 진행됐다. 여름방학, 겨울방학 때가 되면 양국을 오고가며, 선사·고대·근대·현대 분과별로 정한 목차와 내용을 전체 회의를 통해 점검했다. 이러한 작업에는 한국과 일본의 교수 및 교사, 대학원생이 모두 40명 정도가 참여했다.

한일공동역사교과서는 총 11장으로 구성됐다. 각 장은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양국 교수가 나누어 먼저 개괄한 다음, 2~7개의 절을 또 다시 한국과 일본의 교수 및 교사들이 기술했다. 예를 들어 근현대사의 첫머리인 ‘제1장 서구의 충격과 동북아시아의 재편’은 △이 시기의 일본(정재정) △이 시기의 일본(오구시 준지) △제1절 개항과 불평등조약의 체결(오카다 도시키) △제2절 조일관계의 전개와 마찰(정재정) △제3절 日淸(淸日)전쟁과 대한제국의 성립(기미지마 가즈히코) △제4절 日露전쟁과 통감정치(야마구치 고이치) △제5절 항일투쟁과 대한제국의 주권상실(장종근)로 구성됐다.

공동으로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일은 예상대로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일본학생들은 ‘한반도’라는 명칭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선반도’라고 해야 알아들었고, ‘동해’와 ‘일본해’를 쓰는 데 있어서도 입장이 명확히 갈렸다. 명칭의 문제뿐만 아니라 시각차도 상당히 컸다. 예를 들어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한국 측과 일본 측의 입장은 여전히 컸다.

이러한 이견은 한발자국씩 물러나 상대국 입장을 존중하며 조정됐다. 명칭의 경우 병기를 하면서도, ‘동해’와 ‘일본해’처럼 첨예하게 대립되는 명칭은 서로의 입장에 따라 기술됐다. 또 의견차가 심해 도저히 합의를 보지 못하는 부분은 각기 다른 의견을 모두 게재한 다음 어떻게 다른지 서술하기로 했다. 이우태 서울시립대 교수는 “아마 국가를 대표하는 공식적인 견해라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한일공동역사교과서는 원고를 최종적으로 수정하는 단계에 있다. 공부를 하면서 쓰다보니 지나치게 전문적인 내용이 많아 고등학생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8월까지 편집을 끝내고 금년 내 출판할 예정이다.

이우태 교수는 “독도문제와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터지면서 한일공동역사교과서 출간이 조심스럽다”라고 말하고, “그래도 한국과 일본의 고등학교 현장에서 이 책이 조금이라도 반영됐으면 좋겠다”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