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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과 제휴: 과학철학의 최근동향
확장과 제휴: 과학철학의 최근동향
  • 이상욱 한양대
  • 승인 2005.04.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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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영역 탐구 활발...학문간 '관계성찰' 시도

  과학철학의 Paradigm Shift
  과학철학이 과학사회학의 구성주의적 입장을 적극 수용해 각 분야별 과학의 존립근거에 대한 성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화학이나 나노과학의 세밀한 현상에까지 성찰적 시선을 들이대고 있으며 과학이론들 사이의 자율적 관계에 대해서도 논의가 활발하다. 가령 생물학적 진리와 물리학적 진리의 상호이동 불가능성에 대한 이블린 팍스 켈러의 논의가 대표적이다.
물리학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에서 일색에서 벗어나 혼돈이론, 유체역학, 고체이론, 계산물리의 영역에 진출.
화학 화학의 ‘원소’ 개념이 물리학의 ‘원자’ 개념을 넘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생물학 계산적 접근방법이 진화과정을 이해하는 데 어떤 의의를 갖는가 등 생물학과 전산학의 융합.
기타 민족개념에 대한 과학적 이해의 시도, 나노스케일의 실험현상에 대한 철학적 접근.

 

▲ © 이상욱 한양대 교수(과학철학)
과학철학은 과학적 탐구활동과 결과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과학이 다루는 분야가 점점 더 넓어지고 전문화되어가는 현대과학의 추세를 고려할 때 최근 과학철학의 두드러진 경향 중 하나가 과학철학의 연구주제들이 다양해졌다는 점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과학철학의 연구주제가 다변화되는 양상을 살펴보면 보다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과학철학은 과학의 합리성이나 실재론에 대한 논의처럼 과학의 공통적 본성에 대한 인식론적, 존재론적, 방법론적 논의를 하는 일반 과학철학 분야와 물리학이나 생물학의 구체적인 내용에 담긴 철학적 함의를 탐구하는 개별 과학철학 분야로 크게 나뉘어진다. 그런데 최근 과학철학의 연구주제를 살펴보면 이 두 분야 모두에서 ‘확장’과 ‘제휴’의 방식으로 분명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일반 과학철학 분야를 살펴보면, 예전부터 논의되던 합리적 이론선택이나 과학이론의 성공에 대한 설명 등에 대한 연구도 여전히 활발하지만, 과학방법론이 성적으로 편향적일 수 있는 양상에 대한 논의나 실험하기 자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 그리고 극적인 방식으로 오해되어 욌던 논리실증주의의 본질에 대한 연구처럼 이전의 연구에서는 본격적인 학술적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신선한 주제로의 확장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확장은 상대적으로 침체에 빠졌던 전통적 주제에 대한 기존 논의에도 활력을 불어넣는 ‘생산적 확장’이 되고 있다.

 

또한 주목할 점은 과학을 다양한 각도에서 통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과학에 대한 메타적 분석을 수행하는 다른 분야와의 제휴도 눈에 뜨인다는 점이다. 상당히 뜨거웠던 ‘과학전쟁’을 거치며 많은 과학철학자들이 과학사회학의 구성주의적 접근을 극단적 인식론적 상대주의로 간단하게 비판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가진 장점과 단점을 철학적으로 꼼꼼하게 분석하려는 시도가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새로운 제휴대상을 모색하는 한편 몇몇은 과학철학과 오랜 동맹관계를 맺어온 과학사와의 협동작업을 보다 본격적인 형태로 끌어올리고 있다. 즉, 과학사의 사례연구를 특정 과학철학적 주장을 위한 예시정도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인 과학사 연구와 그 안에서 과학철학적 함의를 이끌어내는 작업을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과학철학이 점점 더 다원주의적 연구방법론을 채택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철학적으로 의미있게 논의될 수 있다고 여겨질 수 있는 것의 지평 또한 확장되고 있음도 의미한다.

 

개별 과학철학 분야에는 어디를 보아도 확장의 기색이 완연하다. 우선 말 그대로 그 전에 자주 다루어지지 않던 많은 분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화학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고,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에 대한 논의도 매우 활발하다. 그러나 이러한 확장은 단순히 전통적으로 논의되던 물리학과 생물학에서 화학이나 사회과학으로 연구주제가 확장되었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리학과 생물학에 대한 논의도 전통적으로 연구되던 양자역학이나 상대성 이론에서 벗어나 혼돈이론이나 유체역학, 고체이론, 계산물리 등으로 확산되어가고 있고 마찬가지로 전통적으로 진화론과 유전학의 환원가능성에 초점이 맞추어지던 생물학에서도 발생생물학과 생태학, 동물행동학 등으로 논의가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주제의 확장이 철학자들이 기존 주제에서 더 이상 연구할 거리가 없어졌다고 판단했기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연구는 양자역학이나 진화생물학에 대한 논의와 나란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과학철학의 전반적인 흐름이 물리학에서 철학적으로 논의할 만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소위 근본이론이라고 여겨진 양자론과 상대론밖에는 없다는 생각에서 물리학의 다양한 영역과 단순한 응용분야로 여겨진 화학 등도 실은 독자적인 철학적 함축을 갖는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런 연구주제의 확장에는 물리학을 가장 근본적인 이론으로 보고 물리학에 대한 연구만 잘 수행하면 과학의 본질과 방법론에 대한 모범답안(?)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과학철학의 고전적 가정이 이제는 설득력을 잃었다는 점이 배경을 제공한다.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화학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서도 화학이 물리학으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물리학에서는 제기되기 어려운 새로운 철학적 연구거리를 제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널리 퍼져있다. 그래서인지 화학철학 연구는 과거 생물철학 논의가 그랬던 것처럼 화학이 물리학으로 환원가능할 것인가의 문제나 화학이 물리학과 구별되는 독자적 연구방법을 가지고 있는가에 초첨이 맞추어져 있다.

 

이 점은 과학철학 분야의 주요 저널을 살펴보아도 알아차릴 수 있지만 2년마다 열리는 미국 과학철학회의 정기학술대회나 1년마다 열리는 영국과학철학회의 정기학술대회의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보다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미국과학철학회의 경우 2002년 위스컨신 밀워키에서 열렸던 제18회 대회나 2004년 텍사스 오스틴에서 열렸던 제19회 대회 모두에서 이와같은 ‘확장과 제휴’의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작년 오스틴 대회의 분과모임 제목만 살펴보아도 이 사실은 분명하다. 일반 과학철학 분야에서는 예전같으면 철학적으로 너무나 ‘뻔한’ 주제라 여겨졌을, 과학이 어떻게 ‘응용’되는가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또한, 개인적으로 얻어질 수 있는 과학지식과 집단적으로 얻어질 수 있는 과학지식을 비교하는 분과와 과학철학이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으로 유의미할 수 있는지를 차분하게 성찰하는 분과도 열렸는데 이 분과는 지정된 방이 넘쳐나 복도에까지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 들을 정도로 관심이 집중되었다. 여기에 더해 이제는 단골메뉴가 된 과학철학의 역사에 대한 분과와 성과 과학에 대한 분과가 있었고, 과학철학의 확장경향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분과로 냉전시기의 과학의 특징에 대한 분과나 종족이나 민족 개념이 과학적으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개별과학의 철학 분야에서도 이러한 확장과 다원적 연구경향은 확인된다. 예를 들어 ‘대칭성과 상전이’에 대한 비교적 새로운 주제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 전통적인 주제인 양자역학의 해석문제에 대한 논의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고, 최근 과학게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나노영역의 과학에 대한 토론도 주목을 끌었다. 생물철학 분야에서는 계산적 접근방법이 진화과정을 이해하는데 어떤 의의를 갖는가와 같은 생물학과 전산학의 융합에 대한 분과가 있었고 화학과 생물학에서의 모형을 사용하는 방식을 서로 비교하는 분과가 있었다. 화학철학 분야는 화학원소 개념이 물리학의 원자 개념을 넘어서 존재론적으로 혹은 인식론적으로 어떻게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분과모임이 있었다. 이런 모든 분과논의들은 물론 일반 과학철학의 전통적인 주제인 과학이론의 본성이나 결단 이론 논의와 개별 과학철학의 전통적 주제인 진화론이나 상대성 이론에 대한 분과와 나란히 열렸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즉, 논의주제가 단순히 바뀐 것이 아니라 확장과 제휴의 특징이 분명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예전과 비교해서 이런 전통적 주제가 전체 논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생산적 확장’의 분위기를 대표할 수 있는 책이 2002년에 출간된 이블린 팍스 켈러 교수의 ‘Making Sense of Life: Explaining Biological Development with Models, Metaphors and Machines' (Harvard University Press)와 2004년 출간된 장하석 교수의 'Inventing Temperature: Measurement and Scientific Progress' (Oxford University Press)이다. 켈러의 책은 최근 핫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발생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꼼꼼한 과학사의 연구와 접목시켰다는 점에서 생물철학에서의 새로운 주제로의 확장과 과학사와 과학철학 사이의 ’생산적 제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켈러는 이 책을 통해 기본적으로 물리학을 염두에 두고 제안된 기존의 과학철학적 견해가 생물학에서는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는 점(생물학은 물리학이 아니다!), 그리고 생물학에서 좋은 설명과 좋은 이론으로 평가되는 기준이 유일하지 않고 다양한 인식적 문화에 따라 다원적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장하석의 책은 과학사와 과학철학 간의 생산적 제휴를 넘어 융합으로까지 진척시킨 드문 사례를 보여준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 하는 온도를 어떻게 측정하게 되었고 그 개념이 어떻게 과학이론을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탁월하고도 흥미진진한 역사적 분석을 통해 보여준 후 그에 입각하여 존재론적 가정이 과학활동에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가를 설득력있게 논증하고 있다. 이 두 권의 책이 최근 과학철학을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떤 책이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최근 연구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은 틀림이 없다.

이상욱 / 한양대 과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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