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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54] "가장 인간적인 문명은 육체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문명"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54] "가장 인간적인 문명은 육체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문명"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08.10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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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유
시몬 베유(Simone Adolphine Weil, 1909~1943)
시몬 베유(Simone Adolphine Weil, 1909~1943)

 

1970년에 재수를 하던 나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그 해 11월 전태일의 분신이었다. 나보다 4년 연상인 그는 대구의 가난한 재봉사 집에서 태어나 재봉사로 살다가 서울에 올라와 노동운동을 했다. 그가 분신한 평화시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는 노동자를 위해 살겠다고 결심한 나는 대학생 시절 몇 차례나 경찰에 끌려 다녔고 대학원에서 노동법을 전공했지만 교수가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당시 노동법 전공교수는 한국에 거의 없었고, 노동법을 가르치는 대학도 많지 않았다.

1970년대 후반에는 노동야학에 열중했었다. 당시 공군장교라는 신분을 숨기며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에게 노동법을 가르친 순수한 열정은 우연하게 대학에서 노동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어졌지만, 노동자들이 아닌 대학생들에게 노동법은 학점을 따기 위한 과목의 하나일 뿐이어서 대학에 그대로 있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그 무렵 결혼을 했고 아이들이 태어났으며 대학 외에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래서 학문도 무의미하지 않다고 생각해 시간강사를 시작했고 여러 나라를 다니며 노동법을 연구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노동법 실무를 다루는 노무사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노동법에 대한 나의 학문적 관심은 엷어지기 시작했다. 인권에 대한 관심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부터는 대학에서 학생운동도 교수운동도 사라지고 모두 경쟁으로 치달았다. 그 때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다시 찾은 책이 시몬 베유(Simone Adolphine Weil, 1909~1943)의 평전이었다.

 

공장 노동자부터 트로츠키까지, 그가 돌본 사람들

 

노동야학을 하던 1978년에 나온 시몬 베르트망의 『시몬느 베이유, 불꽃의 여자』(까치)를 읽고 감동하여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에게 베유의 삶과 생각을 이야기했던 추억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공원에서 즐겁게 웃으며 노는 아이들에게, 당시 중국에서는 내란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웃는다고 소리쳤다는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그의 순수함에 감동하던 청춘들을 지금도 선연히 기억한다. 나와 같은 20대의 철학교사로 노동자들을 만나 노동자들과 같은 의식주를 나눈 베유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별이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노동자들과 파업도 함께 했다. 그리고 노동자들도 인류의 지적 재산을 공유할 권리가 있다고 하면서 월급으로 책을 사서 노동자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나도 어설프게나마 그를 모방하려고 했다. 대학에서 데모를 했다는 이유로 전임 임용에서 탈락하면서는, 항상 교육 당국과 마찰을 빚어 여러 학교로 쫓겨 다녀야 했던 베유를 읽으며 위로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베유가 1934년부터 1936년까지 노동자로 공장에서 일하면서 그 참상을 기록한 『공장일기』였다. 그는 힘겨운 공장 노동이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알기 위해 공장에서 일하고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기계가 노동자들을 정신적으로 황폐화시키는 것을 보고 사회혁명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렸고, 늑막염에 걸려 공장의 일자리도 포기해야 했다. 1936년 여름 스페인에서 쿠데타가 터져 내란이 시작되자 베유는 자신이 누구보다도 전쟁을 혐오하지만 전장 밖에서 떠드는 인간들을 혐오한다고 하면서 스페인으로 가 아나키스트 계열의 부대에 들어갔다. 평화주의자로서 무기를 들 수 없어서 취사병으로 일하다가 실수로 부상을 당해 몇 달 만에 파리로 돌아왔지만 전쟁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특히 아나키스트들이 함부로 적을 사살하는 점에 환멸을 느꼈다. 그것이 전쟁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탓인지 그는 그 환멸로부터 내면으로 향했다.

 

 

그 뒤 베유는 내면의 추구에 몰두했다. 1937년 4월 베유는 이탈리아 여행을 하던 도중에 밀라노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고, 이어 아시시의 산타 마리아 대성당에서 조토가 그린 프레스코를 보고 신적 영감을 받았다. 1938년에 두 번째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다시 같은 체험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나치즘의 역사적 배경을 일리아스에 서술된 폭력을 예로 삼아 『일리아드 또는 폭력의 시(L'Iliade ou le poème de la force, 1939-40)』를 썼다. 이어 나치가 프라하를 점령하자 자신의 평화주의에 회의하면서도 공산주의가 희망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프롤레타리아를 적으로 간주한다고 비판했다. 베유는 이미 1932년 독일에 체류하며 관료화되고 혁명의 반역자가 되어버린 소련을 비판했고 1933년에는 소련에서 추방된 트로츠키를 파리에 있는 그녀의 부모의 집에 묵게 하기도 했다.

 

『일리아드 또는 폭력의 시(L'Iliade ou le poème de la force, 1939-40)』
『일리아드 또는 폭력의 시(L'Iliade ou le poème de la force, 1939-40)』

 

1940년에는 『바가바드기타』와 『우파니샤드』를 열심히 읽었다. 같은 해 6월에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하자 베유는 가족과 함께 마르세유로 피난하면서 내면적 성찰을 수첩에 적었는데, 그것은 사후에 『카이에르(Cahiers)』로 출간되었다. 같은 해 드골이 자유 프랑스를 선언하자 이에 반대하고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가 가족 전체가 영국으로 망명하여 런던에 정착했다. 1942년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여행하면서 뉴욕에서 다시 큰 영감을 얻었다.

 

힌두교의 3대 경전으로 꼽히는 바가바드기타와 우파니샤드
힌두교의 3대 경전으로 꼽히는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

 

그 후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기 위해 다시 영국으로 갔다. 그러나 프랑스 레지스탕스 지도자들은 낙하산을 타고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에 침투하고자 한 그의 소망을 저버렸다. 결국 베유는 후방에서 레지스탕스를 지원하며 집필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는 난민들에게 배급되던 보잘것없는 음식을 똑같이 먹으며 지내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영양실조와 결핵으로 쓰러져 1943년 켄트 주 애시포드의 요양소에서 사망하였다.

베유의 삶과 글은 읽을 때마다 감동 자체로 다가왔다. 베르트망의 책을 읽은 뒤 베유가 쓴 책을 계속 찾아 읽었는데 처음 본 것이 『영혼의 순례』였다. 그 뒤로 베유의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끝없이 쏟아졌지만 종교적인 것이 많아서 1990년대쯤부터는 나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또는 T.S 엘리엇이 그에 대해 “보수주의자라고 자처하는 대부분의 사람보다 훨씬 더 성실하게 질서와 계급제를 사랑했고,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대부분의 사람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민중을 사랑했다”고 한 말을 그대로 믿고 멀리한 탓일까?

 

예수도 노동자 출신, 제도화된 종교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

 

베유가 부유한 유대인 의사의 딸로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의 명문인 앙리4세고등학교와 에콜 노르말에서 공부하면서 알랭(Alain)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도 나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었다. 본명이 에밀 샤르티에(Emile Chartier, 1868~1951)인 알랭은 『행복론』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유명했다. 그러나 알랭의 처세론으로부터 베유의 고뇌를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베유가 알랭에게 철학을 배울 무렵부터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고 여러 차례 농장에서 일하면서 노동을 경험하면서 노동조합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알랭도 베유처럼 보수와 진보의 양면을 가졌음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였다. 알랭은 26세 때 드레퓌스를 옹호하여 유명해진 뒤부터 정치활동과 민중교육에 적극 참여했다. 1930년대에는 반파시스트 활동을 했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알랭의 이런 점이 전혀 소개되지 않았을까?

 

에밀 샤르티에(Emile Chartier, 1868~1951)

 

베유에 대한 회의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나키스트라는 점은 그를 처음 알았을 때부터 의심한 적이 없다. 베유는 "가장 인간적인 문명은 육체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문명"이라고 했다. 사회의 분업화와 체계화의 핵심에는 항상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이분법이 도사리고 있고, 육체노동에 비해 정신노동을 중시하는 가치 평가가 내재되어 있다. 체계는 최고의 상급자가 가장 정신적인 노동에, 그리고 최하의 계층은 가장 육체적 노동에 중시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베유는 바로 이 구조를 붕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순한 결과이지만 어떤 상급자라도 모두 유사한 육체적 노동에 종사하게 되면, 그 사회의 체계는 결코 비대해 질 수 없다고 하면서 베유가 제안했던 인간적인 문명이 실현된다면, 인간 개체 한 명 한 명을 작은 수단들로 간주해 온 국가 같은 거대 체계들은 더 이상 발을 붙일 수가 없을 것이다.

 

 

베유는 신앙과 교회를 구분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충실성과 교회에 대한 사랑을 구분하기도 했다. 예수도 노예와 다름없는 노동자 출신이었으며,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 모세를 통해 역사에 개입했다고 믿었다. 그러한 모든 역사적 순간에 가장 큰 혁신의 무기는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며, 슬픔을 통해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긍정하는 것이라고 믿은 베유는 종교의 제도화에 대해서는 톨스토이처럼 비판적이었다. 그래서 중세에도 십자군전쟁이나 종교재판을 용인한 성인이 있었던 이유를 교회가 사회구조화된 탓으로 본 그는 가톨릭교회에 존재하는 애국심을 경원한 점에서도 아나키스트였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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