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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서평: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이숙인 지음, 여이연 刊, 516쪽, 2005)
논쟁서평: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이숙인 지음, 여이연 刊, 516쪽, 2005)
  • 강신주 인천대
  • 승인 2005.03.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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陰陽으로 유교의 남성성 격파…절반의 승리에 그쳐

2005년 3월 2일 상징적인 사건이 터졌다. 많은 여성들의 감격의 눈물 속에서 호주제 폐지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것이다. 그러나 이틀 뒤 바로 호주제 폐지가 우리나라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취지의 헌법소원이 어느 남성에 의해 제기되었다. 호주제를 제거해야 할 ‘악습’으로 보는 입장과 호주제를 지켜야 할 소중한 ‘미풍양속’으로 보는 입장이 충돌한 것이다. 이 충돌은 단순한 입장 차이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유학 전통’에 대한 가치평가라는 중대한 문제를 함축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 때 ‘유교 페미니즘’이란 연구 시선을 개척한 여성동양철학자 이숙인이 지은 ‘동아시아고대의 여성사상’이란 책이 평자의 손에 들어왔다. 평자는 호주제 폐지와 관련된 일련의 사태들을 반추하며 그녀의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어나갔다.

“변화와 불변의 경계”에서 사유하다

‘유교 페미니즘’은 여성의 시선으로 ‘유교’를 독해하려는 노력이다. 유교 혹은 유학이 동아시아의 가부장제를 옹호했던 담론임을 생각해볼 때, 평자는 그녀의 시도가 상당히 전투적이고 폭로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그녀는 유학을 적으로 삼아 전쟁을 치루면서도 유학 속에서 여성의 아군을 찾으려고 시도한다. 이 점에서 그녀의 ‘유교 페미니즘’은 전면전이라기보다는 게릴라전이다. 적진의 무기나 식량이 떨어질 때 적을 혼동에 빠뜨리고 마침내는 괴멸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그녀의 움직임은 주목할 만하다. 그녀가 유교 전통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쉽게 제거될 수 없을 정도로 고질적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양파껍질을 벗겨나가듯이 많은 유학 경전들을 독해해가면서, 이숙인이 유학의 논리 핵심부에서 발견하는 것은 무엇인가. 평자가 보기에 그것은 8장(‘음양이론: 변화와 불변의 경계’)에서 사유되고 있는 ‘陰陽의 논리’다. 이 부분에서 그녀는 유학이란 적진 속에서 그 적들이 쓰던 무기를 탈취해서 자신의 무기로 삼으려고 한다. 그녀는 “음양 이론은 남존여비를 논증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고, 남녀가 동일한 인격적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말한다. 음양 이론이란 무기를 가지고 유학 전통이 남존여비를 주장한 것에 대해 동일한 무기로 맞선 것이다. “음양의 세계관은 궁극적이고 형이상학적 절대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궁극적 절대자가 존재하는 문화에서는 대개의 경우 그 절대자가 보편자의 이름을 가진 남성이었음을 상기할 때, 이러한 음양의 세계관은 우리에게 일정한 의미를 던져준다”고 주장한다.

이숙인의 이런 사유는 ‘주역’ ‘계사·상’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一陰一陽之謂道”에 대한 숙고로부터 나온다. 이 구절은 상이한 두 가지 독해법을 모두 함축한다. 첫 번째 독법은 이 구절에서 나오는 ‘陰’과 ‘陽’을 명사로 읽어, “하나의 음과 하나의 양이 도다”로 해석하는 것이다. 반면 다른 두 번째 독법은 이 두 단어를 동사로 읽어,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이 도다”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녀에 따르면 전자의 독법은 음과 양이 독립된 실체로서 서로 바뀔 수 없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함축하고, 후자의 독법은 모든 개체에게는 음과 양의 두 속성이 갖추어져 있기에 모든 개체는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함축한다. 그녀는 명사로 해석된 음양 논리가 남성과 여성의 자기 정체성을 정당화한다면, 동사로 해석된 음양 논리는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자기 완결성을 지향해서 변화하는 존재임을 나타낸다고 본다. 이런 해석을 기초로 이숙인은 “남성과 여성이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타자를 존중하는 관계의 철학이 열릴 수 있고, 반면 남성과 여성이 각각 자기 완결적인 동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양성 평등에 기초한 인간 보편의 문제를 심화시킬 수 있다”고 마지막 전망을 한다.  

음양에 관한 이숙인의 해석이 학문적으로 객관적인지는 논외로 둔다. 저자는 남성 주석가들의 해석을 벗어나서 여성의 입장에서 이 구절을 독해한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해석을 굳이 평가하려고 한다면 이런 해석이 의도했던 바람직한 남녀 관계를 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음미해야만 한다. 과연 남성이 여성과 정말 다르다면, 왜 남성은 여성을 존중해야 하고 혹은 역으로 왜 여성은 남성을 존중해야만 하는가. 다름의 상태로부터 관계의 철학이 나오기 위해서는 그녀가 제안한 신비한 감응이 아니라, 결단과 비약이라는 주체의 역량이 남성이나 여성에게 허락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남성과 여성에게 이런 역량이 허락된다면, 남성과 여성은 주체로서 만나고 서로 연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같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또 묻고 싶다. 남성도 하나의 음양을 가지고 있는 자기완결적인 존재이고 여성도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관계의 테마인 평등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평등은 단지 아름다운 풍경을 예견하는 수사학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모나드적 남성과 모나드적 여성은 라이프니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창이 없어서, 결국 예정조화의 낙관론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적 주체성 함양에 과연 도움될까

페미니즘은 중요할 뿐만 아니라 소망스러운 사유다. 그렇지만 그것은 남성지배의 역사로부터 남녀가 공존하는 미래로의 이행을 꿈꾸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억압받았던 여성들에게 삶에 대한 긍정과 주체로서의 성장을 가능하게 해주는 울타리이자 전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분명 이숙인은 유학이 남성적 담론임을 치밀하게 폭로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페미니스트적인 전망은 그다지 성공적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여성성과 남성성을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음양[=남녀] 논리로 접근하는 한, 그녀는 여성의 주체성과 정치성을 사유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음양 논리에 입각한 전망은, 현실에 직면해서 주체를 구성하고 연대를 조직할 수 있는 여성의 실천적 역량에 이론적 무기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남녀간의 새로운 관계는 현실을 살고 있는 여성과 남성, 그들 각자의 주체성으로부터 결단되고 연대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닐 것이다. 이 점이 그녀의 글을 읽으며 내내 아쉬웠던 대목이다. 결국 이 책은 절반만 성공하고 그 나머지는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절반의 성공만으로도 저작의 가치는 충분하다.

강신주 / 인천대 동양철학

필자는 연세대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자와 다산의 미발론: ‘존재론적 감수성’과 ‘신학적 감수성’의 차이’ 등의 논문이 있고, 저서로는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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