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0:25 (목)
담론비평: 과학자들의 글쓰기 유형 분석
담론비평: 과학자들의 글쓰기 유형 분석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03.2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비적 상상력 충만…지나친 ‘빗장풀기’는 역효과

과학자들의 글쓰기가 낯설지 않을 만큼 흔해졌다. 우리 사회에서도 과학자의 역할이 과학적 담론의 창출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을 말해준다. 과학자들의 글쓰기는 개별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공통적인 점을 드러낸다. 이것은 일반 지식인들과는 구별되는, 과학자들의 ‘과학적 글쓰기’의 특징을 구성한다. 최근 언론에 기고된 과학자들의 글을 중심으로 이런 점을 유형화해서 분석해본다. / 편집자주

과학자들의 글을 객관화시킬 때 가장 두드러진 것은 ‘교정적’ 기능이다. 과학의 대중화가 뒤처진 사회답게 일반 담론 속에서의 과학지식은 전문가들이 보기에 잘못된 것 투성이다.

동아일보에 이덕환 서강대 교수(화학), 최준곤 고려대 교수(물리학)가 연재하는 ‘Really?'는 이런 교정적 역할을 아예 장르화시킨 사례이다. 불타는 석탄 위를 걸어갈 때 화상을 입지 않는 이유가 발에 배인 땀이 수포 역할을 해서 열전달을 막기 때문이라는 것, 얼음 표면이 미끄러운 이유가 “결합할 수소를 찾지 못한 분자가 녹아있기 때문”이라는 등으로 상식의 과학적 배경을 알려주거나 잘못된 점을 수정해준다.

과학자들의 글쓰기에서 또한 넓게 분포된 현상은 ‘예시’를 많이 사용한다는 점이다. 어려운 공식과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구체적 현상으로 표현해줄 매개물이 필요하고, 언어의 복잡한 조작보다는, 주변의 사물이나 살이의 형태를 끌어오는 사례가 많다. 분자들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량은 모두 다르다. 물리학자 볼츠만이 알아낸 분자들의 에너지 분포에 따르면 상위 20%의 분자들이 총에너지의 46%를 차지하고, 하위 20%의 분자들은 겨우 4%의 에너지를 나눠 갖는다. 이덕환 교수는 이 점을 알기 쉽게 말하기 위해 ‘평등’과 ‘불평등’ 개념을 도입한다. 그는 “상위 20%의 부자들이 총자산의 80%를 갖고 있다는 실제 우리 생활에서의 모습보다는 나은 편이지만 그리 평등한 세상은 아닌 셈”이라며 분자세계의 불평등을 지적한다.

그러나 글쓰기의 ‘흥’이 유비적 상상력을 자극해서일까, 과학과 현실을 기계적으로 겹쳐서 보려는 경향도 과학자들의 글쓰기에서 유력한 현상 가운데 하나다. 모든 ‘전공주의’가 마찬가지이지만 과학의 세계에서 관찰되는 ‘완벽한 구조’에 사로잡힌 ‘이성’은 현실을 불만족스럽게 바라보기 쉽다. 이런 습관은 ‘과학현실의 국가간 비교’를 행하는 글에도 이어져서 나타나기도 한다. 이복주 단국대 교수(인공지능)가 경험담을 풀어놓은 ‘엘리트 못 키우는 점수 인플레이션’이란 글은 많은 논쟁거리를 담고 있다. “미국의 경우 100점 만점에 평균은 했다는 점수가 50점인데, 한국은 평균치가 70점으로 높게 매겨져 있어서 ‘우수’와 ‘아주 우수’를 구별할 방법이 없다”라는 지적은 일견 무릎을 치게 만든다. 이 교수는 이런 “잘못된 평균치”의 불합리함을 비판하는 것으로 곧바로 나아가지만, 이 ‘70점’이라는 수치는 “평균 이상은 해야 한다”는 한국적 정서를 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60점 미만이면 ‘낙제점’이라는 제도로까지 형성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된 것이 한국의 근대화 과정의 특수성 때문인지, 전통사회에서 온 것인지 탐구하려는 정신은 부족한 면이 있다.

또 하나 번쩍거리며 지나가는 ‘과학자 글쓰기’의 특징은 ‘동양사상’에 대한 노스탤지어의 흔적이다. 과학은 보통 서구의 산물이라 생각하는 우리의 형편 때문에 동양의 과학자로서 자연스럽게 겪게 되는 과정인지, 아니면 과학적 합리주의와 메마른 이성의 세계를 동양적 가치관을 통해서 부드럽게 만들고 싶은 전략적 상상력의 산물인지는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노자’, ‘공자’, ‘주역’, ‘장자’ 등은 과학자들의 글에서 자주 인용되곤 하는 문헌들이다.

그 중에서 김희준 서울대 교수(화학)의 글은 가장 독보적인 과학과 철학의 융합을 보여준다. 경향신문에 연재하는 김 교수의 칼럼을 보면 글이 ‘우주를 향해 열려있다’는 느낌에 휩싸이게 된다. 서울대에서 강의를 잘하는 교수로도 명성을 떨치는 그는 글에서도 ‘진정성’을 가득 담아낸다.

“도덕경에 上善若水라 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말은 모든 것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으며 항상 낮은 데로 임하는 물의 덕을 일컫는다. 40일 금식을 해도 물은 마셔야 하는 이유는 생명의 화합물들과 적절히 융화하면서 생명 현상의 핵심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물의 덕에 있다. 화성 탐사선이 물의 흔적을 발견하여 생명의 가능성이 있다고 반가워하는 것을 볼 때 물의 덕은 우주적이다.”라고 말하는 김 교수의 글은 과학과 철학 사이를 물처럼 오가며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김 교수는 캐나다 로키산맥의 대분기점(the great divide)의 교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분자들이 섞여서 함께 내려오던 물이 어느 한 지점에서 한쪽은 대서양으로 다른 한쪽은 태평양으로 헤어지게 되는 물의 유연성은 자연에 존재하는 힘의 크기에서 온다고 본다. “물의 수소결합이 약하기 때문에 물들의 이별이 가능하다”는 얘기인데 그와 반면에 산소와 수소의 결합은 수소결합보다 10배나 강해서 “로키에서 대서양까지 흐르는 동안 수증기가 되기도 하고 비가 되기도 하지만 물은 물”이라고 말한다.

나아가서 김 교수는 “도덕경은 무극의 도에서 하나인 태극이 나오고, 하나인 태극에서 둘인 음양이 나오고, 둘인 음양이 상호 교류하여 셋인 화합체가 된다”는 것이 “과학과의 놀라운 일치”를 보여준다고까지 말한다. 이것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김 교수가 물에 대한 선인들의 관찰, 사유, 직관의 축적이 기본적으로 물에 대한 과학적 탐구와 다르지 않은 이유로 대상에 대한 窮理의 정신에 바탕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과학과 종교, 과학과 예술을 언급하는 ‘하이브리드’ 또한 과학자들의 글에 많이 나타난다. 이미 몇권의 단행본 번역서로도 이런 생각은 널리 퍼져있는데 홍성욱 서울대 교수는 이 같은 글쓰기를 행하는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의 글은 사회학적이고 역사적이지만 그다지 ‘과학적’이지는 않다. ‘과학과 미술의 닮은 점’이란 칼럼을 보면 홍 교수가 과학과 미술이 ‘친화력’이 있음을, 서로 같은 원리에 기반해 있음을 강조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과학과 미술이 둘 다 이성과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데, 과학이 불같이 일어나던 시절 “피카소가 자신의 그림을 다른 차원으로 옮기기 위해 과학적 설계와 추리를 동원했다”는 역사적 사례를 동원한다. 하지만 이성과 상상력이라는 범주는 어떻게 보면 고무줄과 같은 것이다. 이성을 늘려서 미술에 입히고, 상상력을 줄여서 과학에 맞추는 식의 글쓰기는 “미술과 과학이 서로 만나서 발전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주지 못한다.

그의 논리적 불철저함은 ‘한국에서 노벨상이 나오려면’이라는 칼럼에서도 나타난다. “노벨상 받은 나라 중에 우리나라보다 못사는 나라도 많다”라고 바로 앞에서 말했으면서도 “한국이 노벨상을 받기 위해선 국가가 노벨상에 근접한 학자들을 집중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말은 맞는 말이지만 앞서의 '예시'와 서로 모순된 것이어서 글 자체로 평가하기엔 ‘과연 노벨상과 지원금이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인지 혼동만 준다. 이렇게 글쓰기의 일관성이 떨어지는 문제는, '목적'을 너무나 '분명히' 세워두고 펜을 들 때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예술'과 '과학'이 서로 친밀하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SF 소설'의 예를 드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는 느낌도 든다. 과학과 대중을 친밀하게 만나게 하려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그것이 정확하고 현실적인 인과관계에 의한 것이어야 효과가 클 것이다. 그리고 예술에 숨어있는 과학의 원리와, 물질적 실체로서의 예술과 과학의 '혼합물'은 서로 다른 맥락이기 때문에 구별할 필요도 있다. 이런 논리적 징검다리를 다 건너뛰고 글을 쓴다면 전문가다운 태도가 아니다. 요즘 말하는 예술과 과학의 만남, 예술의 수학적 원리는 그저 가려져 있던 것이 보이는 것일 뿐이다. 그것을 강조함으로써 근대의 질서를 넘고자 하는 ‘탈근대적 발상’은 좀더 튼튼한 '인식론적 계기‘를 스스로 만들어가면서 주장을 펼쳐야 할 것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