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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근대의 표상 ‘사쿠라'
[學而思] 근대의 표상 ‘사쿠라'
  • 이향철 광운대
  • 승인 2001.05.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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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28 16:20:58
이향철/광운대·일본학

지난 해 일본의 젊은 감성파 영화감독 이와이 순지의 ‘사월이야기’를 보았다. 사랑의 시작을 예감하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한편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아직껏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잔영을 드리우고 있다. ‘사쿠라’ 꽃잎이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거리의 모습이며 그 속에 그려지고 있는 보기에 그다지 지겹지 않은 일상의 조각들.
필자는 ‘사월이야기’의 주요 촬영무대가 된 동경 쿠니타치에서 10년 가까이 늦깎이 유학생으로 보냈다. 본래 한적한 농촌이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동경상과대학(지금의 히토츠바시대학)이 옮겨오면서 학원도시로 개발된 곳이다. 여주인공이 자전거를 달리던 대학로 양편에 늘어선 아름드리 ‘사쿠라’ 가로수도 그 때 심어진 것이다. 지금 일본 전국에 퍼져 있는’사쿠라’는 대부분 스스로 번식능력이 없는 ‘소메이요시노(染井吉野)’라는 원예품종으로 유신기에 등장하여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보급된 것이다.
대학에 들어간 후 지금까지 어줍잖게도 정치학, 역사학, 경제학을 넘나들며 내내 붙들고 있는 과제가 하나 있다. 일본에 있어서의 근대적 사유의 성립과 주체적 인격의 확립에 관한 문제이다. 근대적 주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부정적 가치를 타자에게 투영함으로써 자기를 긍정적으로 체현해 나가는 속성을 지닌 것이 아니던가. 안으로는 균질적인 공간을 날조하고 밖으로는 차별을 강조하는 논리가 아니던가. 그러나 국가의 주권과 이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데올로기만으로 국민을 하나로 묶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루소의 다소 과격한 표현을 빌리면, ‘국민을 얽어매는 쇠사슬’을 감추고 지고의 가치와 표상을 담당하는 ‘꽃장식’이 필요하게 된다. ‘사쿠라’의 표상은 바로 이러한 꽃장식으로 근대에 들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원예품종 ‘사쿠라’가 보급되기 이전에 일본의 산야에는 잎과 하얀 꽃이 함께 피는 ‘산벚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다. 한국, 중국의 사천성·운남성, 인도와 미얀마의 접경지대 등 동아시아의 온대·난대지역에 널리 식생하는 품종으로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달리 ‘사쿠라’는 잎이 나기 전에 꽃봉오리가 터지고 꽃잎이 많아 온통 나무를 염홍빛으로 물들인다. 특히 꽃잎이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낙화광경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넘어 처절함이나 비장함마저 느끼게 한다.
명치유신 후 징병제도의 창설과 때를 같이 하여 ‘사쿠라’의 낙화이미지를 무사계층의 죽음의 이념과 결부시켜 군인의 표상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그 중심인물은 당시 군부의 최고책임자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그를 중심으로 하는 쵸오슈우번 출신의 고급장교들이었다. 청일전쟁의 전몰자를 위령하기 위한 충혼탑에는 ‘산벚나무’보다 꽃잎이 많은 ‘사쿠라’가 식수되어 ‘국가를 위한 아름다운 죽음’의 이미지를 증폭시키게 된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사쿠라’ 보급운동이 전개되어 전국이 온통 원예품종 ‘소메이요시노’ 일색이 된다. ‘군국의 꽃’으로서 ‘사쿠라’의 표상이 완성된 것이다. 법요시 종이를 연꽃의 꽃잎처럼 잘라 뿌리던 ‘散華’라는 말은 언젠가부터 ‘꽃(華)이 지(散)듯’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 바치는 것을 의미하고 전쟁과 전사를 미화하는 말로 전화된다. ‘사쿠라’는 부국강병을 국책으로 하는 ‘군국의 꽃’으로 1945년의 패전까지 일본의 국민사상에 강렬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런데 일본의 중국침략이 본격화된 1932년, 경도제국대학의 코이즈미 겐이치 교수에 의해 ‘사쿠라의 원산지는 제주도’라는 논문이 발표된다. ‘사쿠라 = 군국일본 =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이미지의 확산에 골몰하고 있던 군국주의자들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이후 일본의 식물학자들은 온통 이 ‘비국민’ 학자의 학설을 부정하는 데 매달리는 듯 하였다. 한국의 연구자들도 이에 뒤질세라 ‘사쿠라 = 군국일본’이라는 표상을 배제하기 위해 제주도의 ‘왕벚나무’를 일본 ‘사쿠라’의 조상으로 기정사실화하려는 움직임으로 대응해 왔다. 식물 하나가 국가나 민족의 논리에 말려들어 이데올로기로 이용당해 온 웃지 못할 이야기다.
모든 비밀은 ‘사쿠라의 나무 밑에’ 감추어져 있을지 모른다. 무국적성을 특징으로 하는 이와이 순지의 영상미학은 ‘사쿠라’의 낙화장면 하나로 온통 ‘일본화’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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