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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_인문학의 무능, 무능의 인문학
문화비평_인문학의 무능, 무능의 인문학
  • 김영민 한일장신대
  • 승인 2005.03.22 00:00
  •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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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과 공유할 수 없었던 단독자의 고통과 공포를 안고, 겟세마네에서 땀을 흘리던 예수의 위기는 임박한 죽음의 예감이었을까, 아니면 '무능'의 소문이었을까. 죽은 자도 살렸다던 그 젊은이가 죽음으로 치닫는 자신의 무능 앞에서, 그 무능과 죽음을 동시에 수용하면서 얻은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한물 간 얘기, '인문학의 위기'라는 언설은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오히려 그것은 인문학의 현실적 파국에 접근하려는 구체적이고 진지한 움직임을 저지하는 스펙타클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위기라는 것은 바로 그 위기를 빨아먹는 위기담론에 대한 정당화로 낙착됨으로써, 그 모든 호들갑은 한낱 문화적 백일몽의 악순환으로 종결된 것이 아닐까. 그 덕택으로 명개 먼지 한톨만큼 세인의 주목을 끌었으며, 자신의 꼬리를 먹고 사는 환상의 동물처럼 그 주목의 나르시시즘에 취해 주린 배를 도토리 모자만큼이나마 채울 수 있었던 것이 수확이었을까. 더불어, 돌림노래하듯 반성의 은유와 탈주의 換喩를 반복하는 철학과 인문학의 오래된 행로에서, 자본이나 기계와의 싸움 역시 얼마간이나마 인문학자들이라는 이 시대의 어정쩡한 동물들에게 새로운 먹이사슬을 잇게 해주었던 것이 수확이었을까.

근자 자본주의적 재편의 형식으로 오히려 심화되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도 새로운 문제는 없다. 전체주의이든, 자본이든, 기계이든, 혹은 '위기'라는 허망한 시대감각이든, 그것들은 모두 人紋의 삶이 깊은 미소 속에서 스스로의 무능을 실토해야 하는 오래된 환경일 뿐이다. 그것들은 '왕년의 좋은 때'가 결코 있을 수 없는 인문학적 가능성의 그 비어있는 중심을 마음대로 침범하고 유린하는 주변의 풍경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텅빈 무능의 중심 속에서 미래의 급진적 가능성을 배태하는 인문학의 존재론은 자본과 기계의 세상 속에서 오해와 상처의 타자일 뿐이다.

나는 인문학이 '지는 싸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10여년째 떠들었지만, 그것은 정치적 이념이나 자본, 機械神, 혹은 어떤 종류의 현상적 위기를 가리켜서 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역설적 무능에 근거한 인문의 운신 원리를, 그 빈 중심의 가능성을 소환하려는 것이다. 柔弱者로서의 인문이 그 역설적 가능성의 최대치를 지닌 채 이 세속 속을 지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불러본 것이다. 이를테면, 그 무능의 빈 가능성 속에서 늘 새롭게 피어오르곤 했던 인문의 '과거적 미래'(벤야민)에 주목한 것이다.

구조조정이라는 자본주의적 재편의 논리에 따른 소문은 흉흉하다. 그 가운데, 인문학의 현상적 무능은 적나라하게 고발된다. 기계적 속도와 자본적 등가성의 시대에 소크라테스의 맨발로써 尋牛의 보행을 즐기는 인문학도들은 '시대의 외설'(바르트)로 치부되고 만다. 통계적 자본주의가 맹목으로 굴러다니는 홈통 속에서 인문의 가치는 제자리없이 우왕좌왕하며, 새 시대의 희생양을 고른다.

대학이 줄곧 文史哲의 명패만은 유지했듯이, 비록 희생양이라도 그 평시의 모습이야 제법 그럴 듯하다. 인류학적 노작들이 잘 보여주듯이, 그 羊을 王인체 대접하는 평시의 일상 속에서 그 왕은 위기시의 희생양으로 둔갑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라는 기능주의적 祭儀의 구색을 갖추는 것이야 어디 인문학 하나 뿐이겠는가.

그러나, 삶은 실용에 머물지 않고 희생된 가치는 시대의 진통으로 되돌아온다. 지는 방식의 어떤 것 속에서 인문은 오히려 타락한 현재의 공시와 세속의 통시를 고스란히, 힘없이, 그러나 미증유의 비판적 풍경으로 드러낼 것이다. 인문학의 무능과 죽음은 소크라테스나 예수의 속절없는 죽음과 무능이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그 역사귀류법적 진실이 되어 다가올 현재의 세속을 과거적 미래의 그 모든 비판적 무게로써 내리치게 될 것이겠기 때문이다.

김영민 / 한일장신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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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sabin 2007-05-05 03:01:53
예수의 무능과 죽음을 동시에 수용하며 얻은건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얻은거라는 표현은 일단 어페이고, 진리는 그 안에 분명 있지요. 즉, 자신의 무능을 단독자로서 온전히 홀로 남아 불안에 떨며 보았다는것, 그건 신이자 사람의 아들로서 예수의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되는 장면이자, 동시에 불안의 극복이라는 순간을 함께 체험하는 순간이기도 하지요. 즉, 죽음앞에 근원적인 인간의 불안의 극복은 가능하다는 것을 예수는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었지요. 믿음의 힘을 통해 말이지요. 소크라테스가 불안해 하지 않고 독사발을 마신 영웅적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예수는 신의 아들로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내면에 함께했고, 그가 불안에 떠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의 죽음의 의미, 즉, 인간의 죄의 대속은, 허위의 연극일수도 있었을것입니다. 자신의 무능을 온전히 신앞에 드러내고 바치는 예수의 모습은 인간 예수의 모습이고, 그것을 믿음으로 극복하는 순간은 그를 통해 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이 바로 인간의 죄를 대속할수 있는 것이지요.
그 예가 인문학의 죽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좀 오버가 아닌지 우선은 생각이 드는게 사실입니다. 즉, 예수의 죽음은 구원적, 진리적의 차원에서 거론되어야 하고, 글쎄, (인)문학이 세상을 바꿀수있다는 말도 있지만, 신의 역사하심을 똑같은 잦대를 놓고 평가하는건, 결국 인문학 스스로 절망을 자초하는 원인이라고까지 전 생각이 듭니다. 구원의 출처를 제거하는 건 아닌지? 스스로 한계에 부딪혀 희생양을 요구하는 세대. 내용은 다르지만 예수의 시대나 2차대전시 유태인의 학살때나 그런 희생을 요구한는 인간의 심리는 늘 있었지요.
벤야민의 과거의 미래라는 대안도 그 인간 스스로가 옭아놓은 절망의 상태를 극복하려는 하나의 사상적인 반성의 몸짓이라 생각합니다. 예수의 죽음을 변증법적인 체계안에 가두는 그 논리 자체가 절망을 부르고, 신의 과업을 온전히 인정하지 않고 교묘히 가로채는 인간의 오만이라 여기며, 신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마음, 그리고 신의 "우리를 위했던" 죽음의 의미를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는 마음, 그 앞에 과연 새삼스런 희생의 요구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결국은 신의 역사와 죄의 대속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요? 변증은 신의 역사를 이성안에 가둔 한 이론일 뿐입니다. 절망의 다른 모습일뿐입니다.

조염 2006-09-10 11:26:27
인문학이 대중들의 이해가능한 범주 내에 상존할 필요는 없다. 대중들은 그들이 이해 가능한 문화컨텐츠들을 통해서 인문학의 편린들을 주워 섬기면 그만이다. 이 글은 대중적인 일간지가 아닌 우리나라의 상층문화의 담지자들 집단인 교수들을 향해 씌어진 것이다. 어째서 모든 글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그림자 2005-03-31 13:35:49
이 글은 '인문학'이라는 존재론을 현재라는 시간을 통해 과거/현재/미래를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시간과 또 시간을 넘어서는 '현상 속에서의 삶의 존재론적' 통찰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 글은 존재의 근원을 흐르는 삶과 죽음의 양식 속에서 인간 사회의 변함없는 진실을 이야기 하고자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 글이 읽기 어렵다해서 이 글을 쉽게 쓴다고 '모르는 이'가 갑자기 알아질 리도 없는 것이 사실이고, 이 글을 그대로 꿰는 자는 글의 스타일과 관련없이 바로 이 글이 무슨 말인지 알아 듣는 것이다. '알고' '모르고'는 모두 '자신의 카테고리' 속에서 울고 웃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나 예수처럼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말없는 속에 진실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비극'은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타인을 비난하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의 말을 하며, 일대 일로 상대하면 모두가 착한 모습으로 바른 말을 하는 듯 하지만, 전체를 통찰하는 시선으로 볼 때는 항상 '시간 속에서 옮음과 그름'은 또 분명해진다. 선인들은 시비를 떠나서 자유로와 진다고 하지만, 사회 속의 인간으로서 '더불어 함께'를 전제로 할 때는 타인을 비난 하기에 앞서 내 부피가 부족하여 타인을 담지 못한 오해가 먼저 있지 않았나를 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쉬운 말로 모두 알아 듣도록 설명이 가능하다면, 왜 선인들은 모두 바른 말 속에서 세상의 온갖 시비에 휘말려 들어서 죽음을 초래했겠으며, 왜 오래된 책들은 구구절절 쉽고 바른 말로 문자를 남겼지만 '사람'은 변하지 않으며, 왜 고통의 광기 같은 역사는 끝없이 되풀이 되는가, 예와 같은가.

'살아 있음' 앞에 아픔과 고통은 백이면 백사람 모두 같은 것이다. 내가 아프면 너도 아픈 것은 기본이다. 기본과 상식이 결여된, 이 어정쩡쩡한 인간세상에 선생은 왜 글로 화를 부르는지, 왜 알면서 피하지 않는지, 선생의 이 글을 꿰는 자는 다만 그의 앞에서 말이 없어질 뿐이다.

2005-03-29 10:49:36
쉽게 쓰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라고 해서 읽은 후 곧장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것은 아니죠. 깊이 있는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쓰는 것, 그것은 인문학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정이랑 2005-03-28 21:09:50
절망이 꺾이는 이치를 아십니까?
절망이 꺾이는 산문을 보셨나요?
이 글의 독자는 많지 않아도 좋습니다.
'귀 있는 자'들은 듣습니다.

때론, 소수의 절망한 이들을 살리는 그런 글이 따로 있다면, 다수의 이기적이고 배부른 욕도 먹을만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