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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_‘박정희’, 그 텅빈 기표
문화비평_‘박정희’, 그 텅빈 기표
  • 이택광 광운대
  • 승인 2005.03.13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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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 광운대 영문학

박정희 향수는 없다. 박정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기 때문이다. 유령은 과거에서 오는 게 아니라 현재에서 온다. 햄릿의 유령이 그랬듯이, 박정희의 모습으로 출현하는 이 유령도 불행하게 살해당한 아버지의 원혼이 아니다. 원한은 없다. 오직 있다면, 간절한 바램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유령은 햄릿을 부르지 않았다. 반대로 햄릿이 유령을 불렀다. 유령은 위기의 자아를 통합하기 위해 햄릿이 불러낸 하나의 기표다. 그래서 유령은 반복적으로 출현한다.

반복의 자리에 항상 실재가 숨어 있다. 이 실재를 진리의 범주로 생각하는 건 자유겠지만, 엄연히 말해서 실재는 진리에 저항하는 무엇이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유령을 사라지게 한다고 실재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유령이 없다면 실재도 없다. 박정희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놓치고 있는 건 바로 이거다. 박정희의 유령은 이데올로기와 다른 차원에서 출현한다. 이 차원에서 문화는 정치에 개입한다.

누구는 반문한다. “박정희가 경제를 발전시켜서 이만큼 잘 살게 만들어준 공은 인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여기에 대한 대응은 “현재의 경제적 모순을 낳은 주범이 박정희이기에 경제 발전을 제대로 시켰다고 보기 어렵다”는 거다. 옳은 말을 한다고 항상 옳은 효과를 낳는 건 아니다. 이런 대응은 인식론적 정당화 이상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박정희가 경제발전을 이룩해서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는 건 과학적 주장이 아니다. 이건 종교적 신념이다. 종교적 신념을 과학으로 퇴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순진한 계몽주의적 발상일 뿐이다.

물론 경제발전의 공을 박정희 개인으로 환원하는 걸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현재 우리 주변을 떠도는 박정희의 유령은 비판이라는 범주 너머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지금 호명 받고 있는 박정희는 ‘역사적 개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박정희는 이런 역사적 사실성을 탈색시킨 채, 위기에 처한 증상의 임계상황에서 출몰한다. 박정희는 더 이상 쾌락을 주지 못하는 증상을 표현한다. 박정희가 고통스러운 증상이라는 뜻이 아니다. 대중이 원하는 건 증상이 예전처럼 다시 쾌락을 주는 거다. 박정희는 쾌락을 주지 못하는 증상으로부터 다시 쾌락을 얻어낼 수 있다고 믿는 대중의 요구가 다른 모습으로 튀어나온 것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지금 호명 받고 있는 박정희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간다. 박정희를 불러내면서 대중은 자본주의가 다시 예전처럼 자기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를 바란다. 당연히 이런 믿음을 현실성으로 만들어줄 무엇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이런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만들어줄 서사가 있어야하는 거다. 이게 바로 ‘영웅시대’다. 조기 종영 마지막회에서 이 ‘비정치적’ 드라마는 박정희가 재벌의 이기주의를 꾸짖는 장면을 끝으로 내보냈다.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이야말로 현재 박정희가 무엇을 드러내는 것인지 정확하게 보여준다. 박정희는 독재자도 구원자도 아니다. 오히려 박정희는 독재자 또는 구원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해체한다. 이 지점에서 역사적 인물로서 박정희는 존재할 수 없다. ‘그때 그 사람들’은 이런 박정희를 거꾸로 세워놓은 것뿐이다. 작가와 감독 자신이 ‘영웅시대’와 ‘그때 그 사람들’을 가리켜 역사적 사실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는 건 이 때문이다.

“박정희 때문에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는 말과 “박정희가 없어서 못 먹고 못 산다”는 말은 같은 동전의 앞과 뒤이지만, 여기에서 박정희는 항상 비어 있는 무엇이다. 박정희라는 기표가 점유하고 있는 지점은 그 어떤 기표로 대체되어도 좋은 텅 빈 결여의 자리다. 결여로 인해 분열의 위기에 놓인 주체성을 통합시키고자 하는 건 ‘먹고사는 문제’다. 이 먹고사는 문제야말로 윤리를 결정짓는 최종심급이다. 그런데 이 최종심급이 윤리를 혼란시키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뭔가 정체성의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거다. 정체성의 규정은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의무의 문제다. 이런 맥락에서 박정희의 유령은 위기를 맞이한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을 통합시키고자 불려나온 사물이다. 이게 바로 ‘영웅시대’의 마지막 장면이 그들에게 필요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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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2005-03-27 20:22:36
좋은 글입니다. 문화적 시각이지만 박정희시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눈에 번쩍 띄여 좋습니다. 좋은 글을 더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