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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논평: 이 시대, 敎授라는 이름의 직업
교수논평: 이 시대, 敎授라는 이름의 직업
  • 유금호/목포대
  • 승인 2005.03.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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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 복도에서 학생들을 스쳐도 거의 목례도 않고 지나간다고 어느 교수가 투덜거린다. 그걸 이제 알았느냐고 다른 교수가 껄껄거린다. 언제부터인지 학생들은 직접 강의를 듣는 교수가 아니면 거의 인사를 않는다. 교수 연봉 액수를 확인해 본 그들 눈에 교수라는 직업이 별로 경의를 보내고 싶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하기야 지방 일부 사립학교에서는 교수들이 고등학교에 학생을 구걸하러 가는 것이 일상사가 돼버렸다는 풍문도 들린다. 입학생을 끌어오는 능력이 교수평가의 주된 항목이 됐다는 자조적인 이야기도 들었다.

 

교수 집에 들었던 도둑이 헌 책만 쌓인 집안을 둘러보고 집 주인을 앞에서 일장 훈시를 하는 코미디가 공연된 지도 여러 해전이니까 꼭 요새 와서 교수라는 직업이 더 왜소해진 것만도 아니지 싶다.

 

소위 선비라는 사람들이 어느 시대에도 풍족한 삶을 살았다는 기록이나 전언이 없다. 문제는 과거의 선비들은 경제와는 무관하게 비켜 서 있어도 정신적 자존심만으로 자족하며 살아 왔다는 점이다. 선비이기 때문에 요구되는 높은 도덕률이 있었지만 거기에 상응하는 권위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게 경쟁이고 경제논리다. 이 천민자본주의 풍토에서 연봉만을 따진다면 교수라는 직업이나 선비라는 말은 무능이라는 말과 별로 다르지 않을 듯도 하다. 다는 아니겠지만 내 주변 문과 전공 교수치고 자기 월 급여액이 얼마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저 기본생활은 되니까, 연구실에서 밤늦게까지 책 읽고, 글 쓸 수 있으니까 그냥 고마워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신문지상에 어떤 교수가 자기 아들 입시에 관련이 되었다느니, 또 어떤 예능관계 교수가 신입생 실기 점수를 어떻게 했느니, 잘못 들었나 싶은 기사 몇 줄에 대부분 교수들은 얼굴이 홧홧해지고, 참 세상이 스산해지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알량한 교수 연금을 노리고 가족이 어떻게 했다느니, 하면 다리가 풀려 버리는 것이다.

 

도덕적 기준의 와해와 환금성으로 환치된 가치체계 앞에서 부정의 증가는 필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교수라는 직업에 관련이 되면 그 측면은 확대 생산되어 보통의 교수들을 더욱 주눅 들게 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도 경제적으로 세계의 상위 그룹에 든다고 한다. 아시아권 드라마 프로의 상당량이 한국 드라마이고, 유럽 사이버 게임시장의 90%가 한국 작품이고, 우리 자동차가 최근 미국에서 1위를 하고 개인과 단체들의 집념과 노력이 만들어낸 경쟁력 있는 세계적 업적들에 국민들은 잠시 환호와 기대를 보낸다.

 

그러나 그 경제나 과학적 성과의 밑바닥에 잠재해 있는 우리 민족, 어머니들의 지독한 교육열과 묵묵하게 교단을 지켜온 선생이라는 직업의 관계를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오늘도 어깨를 늘어뜨리고 밤늦게 연구실을 지키는 노 교수들의 불면이 당장 세계화의 경쟁사회에서 이미 낡은 구시대의 유물로만 보이는가. 산업사회에서 즉시 환금되지 않은 연구나 지식은 그냥 필요 없는 낭비로만 보이는가. 그들의 구식 가방과 옷차림 역시 사라져야 할 악습인가. 도대체 학생을 구걸하러 다녀야하는 지방의 몇 사립대학 설립에 누가 인가를 내주었는가. 각 지역 국회의원 후보들이 우리 지방에도 대학을 유치할 것이고, 설립할 것이라는 정치논리에 휘말려 바로 몇 해후 대학의 학생수효조차 예견을 못하고 마구 설립허가를 내준 것 누구였는가. 

 

그래도 대부분 교수들은 오늘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이 주어진 소명이거니 묵묵히 강의실과 연구실을 오간다. 낡은 연구실로 향하는 교수들의 흰 머리칼과 구부정해진 어깨 너머로 봄이 시작되고 있고, 몇 몇 부유한 학생들의 고급 승용차가 먼지를 뿌리며 신학기의 교정을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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