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집권 3년째 접어들자 노무현 정권은 ‘경제 올인’을 외치며 실용주의 노선을 걷기로 택했다. IMF 구제금융 이후 몰아쳤던 개혁돌풍을 타고 구조조정에 나섰던 대기업들은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경기가 바닥을 치고 성장세로 돌아섰다는 전망과 함께 수출과 투자도 호조세를 보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중진국 한국’에서 벗어나 대기업 위주의 효율적인 성장전략으로 선진국 진입을 시도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반면 노동자문제 등 재생산의 위기로 분배가 우선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중진국 함정’을 둘러싼 학계의 견해를 짚어봤다. /편집자주
우선 시장경제에 충실하자는 영미식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쪽이 있는 반면 유럽의 복지국가를 리모델링 해 한국적 모델로 수용하자는 쪽이 있다. 또한 여전히 ‘분배’에 초점을 두면서 비정규직 노동문제를 최대과제로 꼽는 부류가 있어 한국경제를 보는 시각이 저마다 엇갈리고 있다. 최근엔 중진국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안들이 나오고 있다. 특히 지난 2월 25일 낙성대경제연구소와 한국경제연구원 공동주최로 ‘중진국 함정 속의 한국경제’라는 주제의 학술대회가 열려 재벌을 긍정하는 쪽으로 논의가 진행돼 한국경제에 대한 전망은 새로운 지형도를 그리고 있는 듯하다.
평등주의가 중진국의 함정?
이런 논리에 힘을 보태는 것으로 안병직 후쿠이현립대 교수의 ‘선진국 따라잡기’ 전략을 들 수 있다. 안 교수는 일제식민지시기 정책이 한국경제성장의 동력이었다며, 이후 한국경제가 선진국을 따라잡는 ‘캣치업(Catch-Up)으로서의 성장과정’이었다고 규정한다. 따라서 그가 제시하는 향후 경제성장 방안도 ‘자주와 자립의 민족주의’를 지향하고 미일과의 우호관계 속에서 선진국의 기술과 자본을 유입하자는 쪽이다. 그런데 사실 좌 원장의 논리는 시장주의자들조차 “성장과 분배가 배치되는 것만은 아닌데 좌승희 씨가 이를 오해한다”라고 비판하는 실정이다. 안병직 교수의 ‘캣치-업’ 전략 역시 ‘구시대적 발상’이란 비판을 비껴가지 못한다. 김재훈 대구대 교수는 “과거에 근거해 지금도 따라잡기 전략을 내세우는 것은 잘못된 진단과 처방”이라고 규정한다.
다른 한편, 지난해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을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던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학)는 “중소기업 발전이 중요하다”라며, 한국경제 문제는 “어떻게 재벌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다이나믹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시장구조를 창출하느냐 하는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계간 ‘아세아연구’(2004년 겨울호)에서 재벌위주의 경제를 강력히 비판했던 최 교수는 올해 초의 한 인터뷰에서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조건 아래서도 한 나라의 정부가 경제생산체제를 국민경제 범위 안에서 민주적으로 재편할 수 있다”라며 노동과 분배를 핵심과제로 삼았다.
IMF 구제금융 이후 이 같은 대립각은 사실 익숙한 것이지만, 그러나 최근 해외파 경제학자인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와 신장섭 싱가포르대 교수가 ‘재벌책임론’을 비판하며, ‘재벌’의 긍정적 존재론을 인정하고 나서서 이를 둘러싼 논의의 지형도가 새롭게 그려지고 있다.
재벌 평가 둘러싼 공방 치열
신 교수의 주장에 대해 “너무나 비과학적이다”라며 메스를 들이대는 이는 김진방 인하대 교수다. 김 교수는 “신 교수는 현실인식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라며 조목조목 따지고 든다. 첫째, “기업집단은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보는데, 미국의 트러스트조차 기업집단으로 본다면 기업집단 아닌 것이 없다. 둘째, 기업집단의 존재이유를 ‘비시장적 가격’에 두는 논리는 경제학에서 ‘거래비용’에 관한 이론을 철저히 왜곡한 것이다. 부당내부거래를 통제하는 규제정책을 비판한 것은 경제학적 논리에도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셋째, “한국 재벌의 부채비율은 355%로 높지 않았다”라는 주장은 잘못됐다. 1997년에는 재벌의 부채비율이 800%에 달했다. 넷째, “다양한 소수주주들로 구성된 외부인들의 표는 한 방향으로 모이기 힘들다”라며 주주자본주의를 비판한 것에 대해 “여전히 소수의 주주의견으로 운영되는 한국현실을 잘못 파악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재벌을 규제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논리는 이분법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가장 쟁점으로 내세우는 것 하나가 ‘노동’문제다. 노동유연성이 지나치게 높아 결국 장기적인 성장잠재력이 잠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주의자’임을 자처하는 강명헌 단국대 교수도 “기업집단은 기본적으로 맞는 논리며 재벌의 경영권도 확보해줘야 한다”라며 신장섭 교수 쪽에 힘을 보탠다. 하지만 그는 “재벌문제가 상존하는 상태에서 규제를 푼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재벌은 아직까지 비효율적인 면이 많다”라며 신 교수의 몇몇 논리를 정면 반박한다. 즉 자유주의나 시장주의자들 역시 재벌을 양면적으로 평가하며, 노동력의 재생산 문제를 간과해선 안된다는 입장이다.
최장집의 ‘제 3의 길’ 현실화 힘들어
강신준 동아대 교수의 견해는 최장집 교수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분배가 적절히 이뤄져야만 경제성장 기반이 마련된다”라며 선두그룹을 경제동력으로 보는 ‘영미형 자본주의’에 반기를 든다. 민주화이후 등장한 개개인들의 사익추구를 두고 최장집 교수가 들었던 ‘민주화의 역설’에 대해서도, 강 교수는 “왜곡됐던 구조에서 갈등이 터져나오는 것”이라며 “필연적이고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조복현 한밭대 교수는 “좌승희 원장 등의 중진국 함정 논리는 진단에서 전망까지 잘못됐다”라며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추구해나갈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기존의 유럽식 사민주의는 무조건적 지원이었기 때문에 ‘생산성 있는 복지’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견해다. 재벌정책비판과 노동문제를 연구해온 장상환 경상대 교수 역시 ‘재생산의 위기’를 들며 ‘분배’의 문제를 강조한다. 그러나 장 교수는 “최장집 교수가 말하는 제3의 길은 제시하긴 쉽지만 현실적으로 실행하기 어렵다”라며, “유럽식 복지국가들을 모델로 삼는 것이 중진국 한국이 감당할 과제”라고 말한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전문가 의견
‘차별’ 없는 ‘차이’
▲김석진 교수 © |
김석진 / 경북대·경영학
경쟁 통한 차별은 ‘정당’
▲배진영 교수 © |
배진영 / 인제대·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