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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가꾼 사람들> : ⑦ 조선 후기 실학자 이옥(1760∼1813)
<역사를 가꾼 사람들> : ⑦ 조선 후기 실학자 이옥(1760∼1813)
  • 교수신문
  • 승인 2000.1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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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1-10 09:05:43

개성적 문체로 남성적 언어·학문에 균열 가한 소수자

 

박영민 / 한국정신문화연구원·초빙연구원

李鈺(字 其相, 號 文無子·絅錦子)은 성균관에서 대과를 준비하던 유생의 신분으로 科試體, 應製文에서의 일탈을 시도하여 18세기 후반기 대대적인 필화사건을 촉발시킨 인물이다. 과시체와 응제문은 균질화된 대상과 구조 안에 군주로 향하는 사대부의 견고한 의식을 담는, 중세의 글쓰기 가운데서도 폐쇄적인 양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옥은 과시체와 응제문에 조선후기 사회의 다채로운 변화를 능동적으로 담지하는 稗史小品體를 구사하여 이 양식의 폐쇄성에 파열을 내었으며 그의 태도는 성균관 유생들의 문체 변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문체를 읽으면 세상의 汚隆을 점칠 수 있다’고 생각한 正祖는 이옥의 일탈과 패사소품체의 확산에서 중세의 질서가 처한 위험을 직감하고 묵과하지 않았다.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뿐만 아니라 과거 응시자, 문신들에 대해 문체를 바꾸라거나 패사소품체를 쓰면 停擧를 시키고 敎授 물망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제재를 가한다. 18세기 후반기의 필화사건은 문체의 변화가 주체와 대상 모두의 사유와 무의식까지 지배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전제군주의 위기의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던 중 남공철이 對策文에 패관잡기어를 쓴 것을 계기로 정조는 조선 초 이래 지속된 載道之器나 六經을 근본으로 하는 보수적 문학관으로 이미 변화하고 있는 조선후기의 문체를 되돌리겠다는 의지를 더욱 강하게 표출한다.
또한 정조의 의도에는 문체를 통하여 왕실과 밀착된 노론세력을 견제하려는 의지가 깔려 있었다. 소수 벌열의 정권 농단에 대항하여 왕권 회복을 도모하면서도 정치문제를 직접 거론할 처지가 못되었던 정조는 문체반정을 미시 권력의 지배 전략으로 실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의 공격을 받은 노론은 다시 남인의 문체를 문제삼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당쟁으로 번져 갔다. 그러자 정조는 이 문제의 책임을 朴趾源에게 전가시키며 문신들에게는 自訟文을 지어바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사건을 수습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옥의 문체는 번번이 정조의 표적이 되었다. 이옥은 과거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과시와 응제에 응하였으나 글을 제출할 때마다 심한 꾸중을 들었고, 그 벌로 軍籍에 편입되었다가 다시 성균관으로 돌아오기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는 수모를 당한다. 또 別試 初試에서 수석을 하였으나 문체가 格에 맞지 않다고 하여 榜末에 붙여지기도 한다. 이옥의 신체는 이미 그 자신의 의식적 성찰의 힘이 미치지 않는 다른 무엇이 되어 있었던 듯 하다. 게다가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당파와 관련이 멀었던 그에게는 구원의 힘이 미칠 곳도 없었다. 이옥의 30대는 이렇게 문체파동의 격랑과 함께 흘러갔다.
이 시기 이옥의 사유양식과 세계관이 이미 자신의 의지를 넘어 중세의 틀을 벗어나고 있었음은 ‘俚諺’과 ‘俚諺引’에서 잘 드러난다. 이옥은 ‘俚諺引’에서 당대의 지배적 담론과 그 담론이 자신들의 근거로 내세우는 經典, 禮, 古人의 말 등의 함의를 의문에 붙이고 기원의 시점으로 소급해 가서 타당성을 다시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 결과 이옥은 당대에 횡행하는 지배적인 담론이 經典과 禮, 古人의 말 등을 자의적으로 왜곡하여 배타적인 항들을 만들고 그들에게 폭력을 행하고 있음을 논증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남녀차별론이다. 이옥은 ‘詩經’을 근거로 하여 가부장제의 지배적 담론이 마치 남녀차별을 생물학적 차원이나 자연적인 차원인양 전가시키려 하지만 그 차별은 역사적으로 제도화된 인위적인 것, 허위일 뿐이라고 밝히며 전도된 가치를 바로잡으려 한다. 또한 이옥은 남녀간의 정을 살피면 “그 마음의 邪正, 그 사람의 賢否, 그 일의 得失, 그 습속의 奢儉, 그 토양의 厚薄, 그 집안의 興衰, 그 나라의 治亂, 그 세상의 汚隆을 알 수 있다”고 하여 남녀 간에 일어나는 다양한 일과 그 일에서 발생하는 문제 즉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통해 세계를 재구성하고 해석하려고 한다.
이옥은 이러한 자신의 사유양식을 ‘俚諺’이라는 66수의 연작시로 형상화한다. “무릇 천지만물을 살피는 데에는 사람을 보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며, 사람을 살피는 데에는 情보다 묘한 것이 없으며, 정을 살피는 데에는 男女間의 情을 보는 것보다 더 참된 것이 없다.”고 한 이옥은 탕자와 그의 아내의 삶을 매우 밀도 깊게 관찰하여 중세를 관통하는 의식의 흐름과 그 흐름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실마리까지 여성의 삶을 통해 중세적 삶의 모든 면을 다시 성찰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여성이 되어 간다.
이옥은 여성과 함께 언어의 용법과 공명의 힘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이옥은 언어란 규칙이나 보편적 원리를 뛰어넘어 많은 사람이 공명할 수 있는 용법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고을 태수의 명을 받아 물목을 들고 제수를 사러 시장에 간 아전이 목록에 적힌 물건이 무엇인지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어서 끝내 사지 못하고 돌아온 일화를 소개하면서 이옥은, 이는 아전의 잘못이 아니라 공명하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태수의 잘못이라고 꼬집는다. 언어란 권력의 표상이나 명령의 체계가 아니라 소통의 체계임을, 공명의 힘이 중요함을 강조할 때 이옥의 신체는 이미 소수자가 되어 있었다.
19세기와 함께 순조가 즉위하자 문체문제에 이어 신유옥사가 새로운 태풍으로 몰아쳤다. 이미 정조는 세상을 떠났지만 이옥은 더 이상 서울에 머물지 못하고 고향인 남양주로 낙향을 한다. 이후 고향에서 50세 초반까지 살다가 생을 마치지만 그렇다고 이옥이 낙향으로 여성 되기, 소수자 되기의 행보를 멈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시대를 앞서 너무 빨리 나타난 사람이라고 하며, 뒷날에 자신을 알아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던 이옥이 고독하지만 쉼 없이 달려간 곳이 중세를 넘어 선 그 어디였던가는 그가 남긴 문집과 소설들, 소품체의 연구를 통해 앞으로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이다.

문체반정
문체반정은 1792년(정조 16년)에 시행된 문화 정책이다. “문체의 盛衰興替는 정치와 통한다”던 정조의 생각은 文이 현실을 그려낸 무늬(紋)라는 동양적인 인문관에서 비롯되었다. 때문에 문풍을 진작한다는 것은 혼미한 국면에 빠져있던 나라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고 볼 수 있다. 사계의 평가처럼, 문명을 떨치던 연암 박지원을 비롯한 노론 벽파에 경고를 주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개혁의 중심을 걸어가던 정조가 서학의 계몽에 앞장섰던 북학파를 공격하려 했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해와 오해 속에서, 그러나 야사는 정조와 문체반정의 대상자들 사이의 내밀한 공감 또한 증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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