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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동향: 생명윤리학, 과학과 동거 청산해야
해외동향: 생명윤리학, 과학과 동거 청산해야
  • 강신익 인제대
  • 승인 2005.02.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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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윤리의 형식주의 비판

강신익 / 인제대 의철학

지난 200년간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에 대한 기본적 상식이 크게 요동친 시기로 기록될 것이다. 진화론이 발표된 19세기가 인간생명이 신에 의한 창조가 아닌 자연선택이라는 가치중립적 과정에 의해 발생했다는 충격적 선언이 제출된 시기였다면, 20세기는 자연선택이 아닌 인공선택이 진화의 방향을 크게 바꿀 수도 있음이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생명윤리는 이렇게 변화하고 있는 생명의 개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생명에 대한 연구와 임상적 적용에 있어 지켜야 할 규범은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학문분야라 할 수 있다. 전자가 생명의 지위와 미래에 관한 가치론적이고 철학적인 전망과 논변이라면 후자는 충돌하는 가치와 세계관을 조정하고 조화시키는 실천적 담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두 가지 논의구조는 모두 생명과학의 발견과 적용가능성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생명윤리는 철학, 생명과학, 윤리학의 혼합일 수밖에 없는 본질적으로 학제적인 학문일 뿐 아니라 이론과 실천이 결합된 탐구영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의 학술 동향을 보면 대부분의 논의가 생명공학적 기술의 적용을 둘러싼 논란과 그것을 해소할 규범을 마련하는 데 집중되어 학제적 성격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970년대에 의학과 철학의 일반적 관계 또는 의학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중심주제로 하여 창간된 <의학과 철학 잡지(Journal of Medicine and Philosophy)>와 <이론의학 잡지(Theoretical Mecicine)>에 실리는 글마저도 점차 첨단 생명공학 기술의 적용과 관련된 논의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론의학잡지>는 1998년 그 제호를 <이론의학과 생명윤리(Theoretical Medicine and Bioethics)>로 바꾸기까지 했다. 이처럼 의학에 관한 윤리적 논의는 생명과학의 적용에 따른 일반화할 수 있는 규범의 문제에 집중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생명과학과 공학기술에 대응해야 할 필요성에 의한 것으로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조금만 더 긴 호흡으로 사태를 바라보게 되면 문제의 다른 측면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글에서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생명윤리의 논의방식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소개하고 이들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다음 가능한 대안을 제시해 보도록 한다.

생명윤리에 대한 비판적 논의들은 대체적으로 외부적 비판과 내부적 비판으로 나누어볼 수 수 있다. 외부적 비판은 주로 사회과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대개 생명윤리라는 학문이 생명공학과 공생관계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특정 사회의 문화적 특수성이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겉으로는 생명과학과 생명윤리가 적대적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상당부분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과거와 달리 생명과학 연구에는 막대한 연구비가 소요된다. 미국을 비롯한 과학 선진국에서는 이 연구비의 일정 부분을 생명윤리 연구에 투자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는 생명윤리가 생명과학의 본질적 문제에 천착하기보다는 절차적 합리성을 확보하는 도구적 역할만을 수행토록 하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압력은 생명윤리적 문제의 성격을 단순히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야기’되거나 ‘창출’된 것으로 가정토록 하며 생명윤리학자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임무를 부여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합리성과 보편성이 표준이 되어 그 지식과 기술이 적용되는 사회의 문화전통은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히포크라테스 시대로부터의 오랜 전통인 책임과 의무 중심의 윤리적 담론은 흔적으로만 남고, 최소한의 권리와 절차적 합리성이 강조되면서 상호의존적인 인간관계와 연대, 공동체의 가치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일찍이 르네 팍스(1976)와 드브리스(1995)와 같은 사회학자들에 의해 생명윤리의 사회학이라는 이름으로 제기되었으나 큰 관심을 끌지는 못하였다.

내부적 비판은 주로 생명윤리의 논의방식이 생명과학이나 의료기술의 직접적 수혜자인 환자와 일반적 생명이 살아가는 ‘자연’의 일상적 맥락을 적절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집중된다. 이는 생명윤리의 논의가 주어진 문제의 해결에만 급급하여 그 문제가 발생한 사회와 문화권의 전반적 맥락과 생태적 연관성을 무시하는 형식적 논의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비판자들은 생명윤리의 대상을 인간 중심에서 자연 그 자체 또는 생태계 전체로 확대할 것을 주장하며, 형식적인 원칙 중심의 논의에서 벗어나 덕 윤리, 페미니스트 윤리, 담화윤리(narrative ethics) 등에서 논의되는 다양한 삶의 맥락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생명윤리는―특히 미국과 그 영향권에 있는 우리나라에서는―여전히 합리적 행위주체와 객관적 행위, 그리고 비용-편익 계산 가능성이라는 방법론적 가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을 겸허히 수용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철학, 생명과학, 윤리학, 사회과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학제적 관점을 확보해야 한다. 모든 분야에 정통한 또 다른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상식에 근접한 일반적 관점을 회복해야 함을 뜻한다. 생명윤리적 문제에 접근하는 각 분과학문은 자기 분야의 논의방식에 안주하지 말고 상식과 상황적 맥락에 빗대어 문제를 바라보고 이것을 논의에 반영하며 다른 분야의 비판을 적극 수용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생명윤리(bioethics)의 본래적 의미로 돌아가 환경윤리(environmental ethics)와 생명의료윤리(biomedical ethics)의 통합을 모색해야 한다. 이는 환경과 생명을 각각 객체적 대상으로 삼는 사고방식을 극복하여 환경과 생명을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지금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논리와 기계적이고 환원적인 세계관에 비추어 이러한 방향의 전환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윤리를 단순히 사례를 분석하고 단기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수준을 넘어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전반적 태도를 바꾸는 생명 문화운동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이상은 주로 유럽에서 논의되고 있는 비판적 생명윤리(critical bioethics)의 주장을 나름대로 정리해본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입장은 주류 생명윤리학의 실용주의적 흐름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자연(天地)을 인간과 구분하지 않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문화전통을 가진 우리로서 참고로 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이러한 비판적 논의는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접화군생(接化群生)으로 대표되는 우리 고유의 생명문화와도 잘 어울린다.  접화군생이란 인간뿐 아니라 동식물과 무기물을 포함한 우주만물을 사랑하고 사귀고 소통하여 감화, 변화, 진화시켜서 완성 해방하는 활동이다. 이런 활동이 바로 홍익이며 '두루 유익하다'는 말의 참뜻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비판적 생명윤리라는 서구 학문을 통해 새로운 생명문화가 필요함을 알아보았는데 정작 그들이 찾고 있던 생명문화의 원형을 우리는 이미 전통사상 속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전통사상의 복원을 통한 창조적 생명윤리의 건설이라는 과제는 실천적 규범을 마련하는 일 이상으로 중요한 우리 모두의 임무가 아닐까?

비판적 생명윤리의 입장을 담고 있는 논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Jennifer Chesworth (ed.), "The Ecology of Health: Identifying Issues and Alternatives", Sage, 1996.
이 논문집은 <병원이 병을 만든다.>로 유명한 이반 일리치를 포함한 문명비판 계열에 속하는 학자와 활동가들의 글들을 모은 것이다.

Richard Twine, "Constructing Critical Bioethics by Deconstructing Culture/Nature Dualism", Medicine, Health Care and Philosophy, 2005.
지난 해 시드니에서 열린 제7차 세계생명윤리학회에서 발표된 이 논문은 르네 팍스와 드브리스의 분석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더 발전시켜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에 도전하는 과격한 주장을 담고 있다.

Wim J. van der Steen, "Forging Links Between Philosophy, Ethics, and the Life Sciences: A Tale of Disciplines and Trenches", History and Philosophy of Life Sciences, 20, 1998.
철학과 생명윤리의 전문가인 저자가 친구의 진료경험을 토대로 의학과 생명윤리의 문제점을 철학적으로 규명한 논저다.

필자는 인제대에서 ‘삼차신경통 치료에 쓰이는 국소적 약제의 신경차단효과에 대한 전기생리학 및 형태계측학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Philosophy for Medicin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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