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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함석헌<54>
내가 본 함석헌<54>
  • 김용준 교수
  • 승인 2005.02.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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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끈의 역사에서 너와 내가 따로 있으랴

▲로스앤젤레스의 처 당질 집에서. ©
<역사란 알기쉽게 말하면 노끈 꼬는 것 같애요. 내가 오늘 노끈 하나 가지고 올까 그런 생각도 했댔는데, 노끈을 꼬면 어드러지오, 노끈을 뭘로 꼬지요, 실오라기 가지고 꼬지 않아요. 농가에서 새끼 오라리를 짚으로 꼬지 않아요. 집은 이만밖에 안되는 거지만 꼬고 꼬고 꼬고 꼬고 그걸 가지고 10발도 20발도 100발도 1,000발도 꼰단 말이야. 또 그보다도 학생들은 잘 알꺼니까, 그건 결국 뭐냐 그러면 섬유로 이렇게 엮어가는 거 아니야요. 섬유는 현미경으로 봐야 뵈는거야요. 그래서 요새는 자연섬유가 아니고 인공으로 만들어 낸 거니까 그렇지만 어쨌거나 섬유인데 섬유가 요거밖에 안되는 거지만 그것이 열 발도 스무 발도 한없는 걸 꼴 수 있는 건 뭐고 하니 고놈이 요렇게 서로 감겨서 휘감겨서 돌아가고 해서 이걸 잡아대려고 끊어지지도 않고 얼마든지 길게 할 수가 있다 그 말이야, 그럼 내가 무슨 소리하는지 알지요?
역사가 뭐냐? 사람이 하는 건데, 사람이라는 거는 뭐냐, 정치하는 사람들이 보는 모양으로 밥먹으니까 사는 거고 계집에 돈 있으니까 살아가는 거지 그리고 몸둥이가 있으니 이러고 저러고 그러지 고자식 목숨만 없어지면 다다, 그렇게밖에 모르지만 그거 아니라 그 말이야, 개인으로 보면 그렇지만 개인에도 속에 정신이라는 거 있어.…개인을 육신으로 보면 한정된 거지만 요거라면 죽으면 다지만 “사람이 죽으면 다야!” 그러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고 인간이 뭔지 선생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고, 참으로 안 사람은 “죽어서도 다 되지 않는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을 해야 인생이 뭔지 아는데, 나는 그렇지 섬유 한오라기 같이 짧은 거지만 요 것이 요렇게 부자관계로 선생 제자관계로 뭣으로 얽히고 얽히고 이럭해서 가면 그 노끈이 수천년도 가고 수만년도 갈 수가 있다 그 말이야.
더더구나 이 안에서 소위 정신이라는 거 있어서 그게 뒤섞여서 이런 다음엔 네 정신 내 정신을 따로 가를 수가 없어요. 역사라는 거는 그렇게 되는 거.
또 다른 비유를 한가지 말하자면 이 벽돌을 가지고 건축을 해 올라가는 거와 마찬가지야. 벽돌 한 개는 요만한 거 얼마 안되는 거지만 쌓고 쌓고 막 쌓는 거 아니야요. 어떤 법칙에 의해서 어떤 설계도에 의해서 무슨 구조를 가지고 그렇게 쌓아 올라가면 그것이 큰 건축이 되요. 그렇지 않아요? 말하자면 사람의 역사생활이라는 건 그런 거라 그 말이야. 요 하나를 보면 하나의 개인 요거 아무 것도 아닌 거, 겉으로 볼때는 고깃덩이 같은 거, 그렇지만 속으로 본다든지 사람의 살림으로 인간관계가 이렇게 되면 그것이 거의 영원성을 띄고 역사건설을 해간다. 그것이 소위 우리 역사라는 거다. 그렇게 생각을 해 보세요…. 무슨 소린고 하니 사람들 마땅히 개체 전체 관계를 알아야 된다 그거야. 이거는 개체고 개인이라고 하는 낱개로 있는 거고, 사람은 낱개가 이거 다가 아니야요.
칼릴 지브란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내 이웃이란 뭐냐? My anotherself" 참 좋은 말 아니요? 내 Self가 나만이 아니야 내 自我란 사람들이 내 자아만 귀한 줄 알지만 말이야, Self는 내 속에 있는 그거만이 아니고 이웃사람(my another Self) 이거다. 적어도 조금 큰 의미로 하면 이 나라의 지금 살아있는 사람은 다 나의 Self라 이거야. 내 맘에 안 든다고 해서 잡아다가 심지어 고소를 하고 그러는 사람이라도 그것도 내 Self인 다음에는 나하고 관계가 있는 사람이지 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말이야. 그 사람은 그런 줄을 몰라서 그러갔지 그러니까 날 미운 마음에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면 불쌍해 보여. 예수님이 “너를 대적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라” 왜 그런고 하니 그 사람을 원수로 알지 않아. 딴 사람으로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알지를 않고 그것도 같은 아버지 자식인데, 꼭 같은 건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내가 아마 첫마디에 ”하나님을 믿으라“고 그런 말 한 겁니다.> (‘씨알의 소리’, 1989년 2월호 통권 98호: 109-112)

위의 함 선생님의 말씀은 1983년 3월 23일 대전 민중교회에서 드린 예배 설교를 발췌한 것이다. 이 발췌문에서 우리는 함 선생님의 역사관 그리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의 형이상학을 볼 수 있다. 1백72개의 정기간행물을 등록 취소시키고 10대 국회의원을 포함한 8백35명을 정치규제 대상자로 발표했으며 재심을 청구한 5백69명 중에서 2백68명이 구제되었다. 결국 5백67명의 정치인들이 발을 묶인 셈이다. 그리고 1981년 1월 15일에는 전두환 대통령 자신을 총재로 하는 민주정의당(민정당)이 창당되었고 이틀 뒤에는 유치송을 총재로 한 민주한국당(민한당) 그리고 1월 23일에는 김종철을 총재로 공화당 이념을 계승한다는 한국국민당(국민당)이 창당되었다. 당시 돌아다녔던 말대로 1대대 2충대 3소대가 이 나라의 정치를 주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소위 장관하고 고만두면 5억원이라는 거금을 전별금으로 받았던 소위 전두환의 통 큰 돈정치가 전개되고 있었지만 함 선생님은 여전히 바쁘게 여기저기 초청강연회에 응하시면서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당신의 생각을 열심히 가르치시고 계셨다. 이미 한두 번 언급한 바 있지만 명동 카톨릭 여학생 회관에서 매주 한 번씩 있었던 선생님의 老子講解는 나로서는 가뭄에 만나는 단 비와 같은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최근 신문보도에 의하면 뉴욕 타임스지는 지난 1월 23일자 사설에서 미국 보수주의 기독교들이 공공 교육기관에서 진화론의 대안 이론을 교육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국립과학원이 “진화론은 현존하는 이론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가장 유용한 이론이며 압도적인 과학적 합의로 이를 저지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소개하면서 ‘지적 설계론’같은 주장을 과학적 대안으로 가르쳐서도 기술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미 소개한 바 있지만 내가 3년간 이사직을 맡고 있었던 미국 기독교 고등교육 연합재단(United Board for Christian Higher Education in Asia: 약칭 UB)은 당시 총재로 있었던 Paul Lauby 박사의 제안으로 1979년도 미국 보스톤에 위치한 MIT대학교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주최한 국제회의는 ‘Faith, Science and the Future’라는 주제 하에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석학들의 세미나로 한 때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 회의는 지나치게 서구사회 중심으로 흘렀다는 비판을 받았던 것을 염두에 두고 규모는 적지만 ‘The Future: Science, Faith and Justice in Asia’라는 주제로 국제 세미나를 열 수 있는 기금을 UB가 제공해주고 그 준비 위원장을 나에게 위촉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본의 UB 이사인 후루야게이이찌 교수와 같이 이 세미나를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는데 아무래도 이런 국제회의를 하나 조직한다는 일이 아무리 규모가 적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간단치가 않은 터이라 이 세미나의 조직 및 그 일체의 실무를 당시 아세아 기독교협의회(Christian Conference of Asia: 약칭 CCA) 사무총장으로 있었던 朴相增 목사님께 간청하여 일임하는 협정을 맺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1983년 12월 18일부터 22일까지 마닐라에서 모이게 되었다. 이 회의의 주제발표(Keynote Address)를 내가 맡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Towards A Paradigmatic View of Science And Technology in Asian Context’라는 제목의 주제 발표를 하였고 또 똑같은 내용의 강연을 미국 뉴욕에서 UB 중심의 학자들 앞에서 발표하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41명의 아시아 각국의 학자 및 신학자, 철학자 및 기독교 관련의 사회운동가들이 5일간의 열띤 토론 내용을 담아서 CCA에서 ‘Toward an Asian Sense of Science and Technology’라는 Proceeding을 발행한 바 있었다. 이 회의의 상세한 내용은 본고의 콘텍스트 밖의 일이기 때문에 여기서 상론하는 것은 삼가기로 하겠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이미 고인이 된 당시의 UB 총재였던 고 Lanby 박사에게 다시 한번 그의 명복을 빌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아마도 최근의 UB는 Lanby 박사 이후로 상당히 보수화되어서 나와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뉴욕타임스지가 우려하였다는 오늘의 시대 역행적인 기독교 보수단체가 아니기를 기도할 따름이다.

이상과 같은 경위로 1983년 12월 중순부터 1984년 초까지 긴 해외여행을 했었는데 때마침 함 선생님께서는 퀘이커 국제회의 참석차 미국에 오셨다가 로스앤젤레스의 선생님 외손자 댁에 와 계셨고 마침 선생님의 막내 사위가 되시는 장기홍 교수도 쎄비티칼로 미국에 와 있어서 며칠간을 매우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일이 기억에 남아 있다. 선생님 외손자인 최응일 군의 결혼 주례를 뜻밖에 선생님께서 나보고 맡으라고 하셔서 최응일 군과는 인연이 맺어졌고 그의 첫 아들의 돌잔치도 그 무렵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약 5년 전에 가장 평안하고 즐거운 한 때를 보내셨을 때의 사진이 아닌가 싶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살고 있던 내 처당질의 집에서 찍은 사진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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