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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시인, 이육사를 아십니까?
대구 시인, 이육사를 아십니까?
  • 양진오
  • 승인 2021.07.07 0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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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오의 거리의 대학 ⑮

“이육사 시인을 안동 출신의 식민지 최고의 저항 시인으로 알았다. 
그런데 대구 원도심을 답사하며 더 배우게 되었다. 
이육사 시인이 생애의 중요한 국면을 보낸 지역이 바로 대구이다. 
이육사 시인에게 대구는 그의 연륜을 깊게 한 실존적 장소에 해당한다.”

나무의 줄기, 가지 따위를 가로로 자르면 나이테가 보인다. 나이테는 나무의 내면이다. 나이테는 나무가 살아온 시간의 깊이다. 사람도 그렇다. 사람에게도 나이테라는 게 있다.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나이테는 단지 나이를 말하는 게 아닐 게다. 사람의 나이테는 연륜을 말한다. 연륜의 ‘륜’은 바퀴란 뜻이다. 연륜 자체가 나무의 나이를 알 수 있는 바퀴 모양의 테를 말한다. 연륜의 또 다른 뜻은 경력을 일컫는다.

사람의 연륜은 저절로 쌓이지 않는다. 세상에 저절로 쌓이는 건 없다. 사람의 연륜을 깊게 하는 변수가 한둘이 아니다. 그 변수 중 하나가 바로 지역이다. 이제 하나의 예를 들고 말해야겠다. 1970년대 한국 노동운동의 기원을 연 열사로 정의되는 전태일. 그에게 대구는 청옥공민학교의 시간으로 기억된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기쁨. 전태일은 그 기쁨을 대구에서 채웠다. 한 사람의 생애사를 정밀하게 탐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사람의 연륜이 어디에서 깊어졌는가를 우리는 종종 간과한다. 여기 또 한 명의 사람이 있다. 전태일보다는 훨씬 이전 시대를 살다 간 사람이다. 바로 이육사 시인(1904~1944)이다. 

퇴계 이황의 직계 후손 이육사

이육사 시인은 흔히 안동 출신으로 소개된다. 틀린 소개가 아니다. 이육사 시인의 고향은 안동 도산면 원천리이다. 1904년 5월 18일에 원천리 881번지에서 출생한다. 시인의 고향 가까운 곳에 이육사문학관이 개관되어 있다. 게다가 이육사는 안동의 대표적인 유림 이황의 직계 후손이다. 이황이 누구인가? 조선 성리학 사림 영남학파의 으뜸이 아닌가. 이황을 제치고 사림 영남학파를 이야기할 수 없다. 이육사 시인, 그러니까 그는 이황 성리학의 정신을 우선 물려받은 거다. 이렇게 이육사 시인과 안동의 관계는 그 무게가 예사롭지 않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육사 시인은 대구의 시인이기도 하다. 이육사 시인이 생애의 중요한 국면을 보낸 지역이 바로 대구이다. 이육사 시인에게 대구는 그의 연륜을 깊게 한 실존적 장소에 해당한다는 말이다. 본래부터 내가 이런 사실을 안 건 아니다. 나는 이육사 시인을 안동 출신으로서 식민지 최고의 저항 시인이라는 식으로 배우고 알았다. 아니 배웠다기보다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 같다. 제대로 된 배움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대구 원도심을 답사하며 이육사 시인을 비로소 더 배우게 되었다. 부끄러웠다. 한국 근대문학 연구자라는 나의 정체성이 참으로 소박했다. 

264작은문학관 내부. 264작은문학관은 이육사 시인의 대구 시대를 기리기 위해 2016년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박현수 교수가 개관했다. 사진=양진오
264작은문학관 내부. 264작은문학관은 이육사 시인의 대구 시대를 기리기 위해 2016년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박현수 교수가 개관했다. 사진=양진오

이육사는 1923년 그의 나이 20세가 되는 해에 대구 남산동으로 이사를 온다. 혼자 이사한 게 아니다. 가족들 다 남산동으로 이사한다. 남산동은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이 교차한 대구의 대표적인 원도심이다. 먼저 남산동 소재 관덕정 인근에서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가 처형된 사건이 기억되어야 한다. 관덕정은 대구 읍성의 남문 영남제일관과 가깝게 위치한 경상감영 부속청이었다. 관덕정 앞마당에서 감영 소속 관리나 병사들이 활을 쏘거나 무예를 닦았다. 수운 최제우만 관덕정 인근에서 처형된 게 아니다. 대구 경북의 적지 않은 천주교 교인들이 여기서 순교했다. 

남산동에는 대구 3·1운동의 지도자 이만집 목사가 시무한 남산교회가 지금도 건재하고 있다. 남산교회만 아니다. 남산동에는 대구 향교가 있다. 본래부터 대구 향교가 남산동에 있지는 않았다. 교동에 있었다. 대구 향교는 1932년 현재 위치인 명륜로로 이전한다. 천주교 계열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도 남산동에 있다. 성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은 1914년 착공된다. 지금도 대구의 천주교 신자들은 신학교 내 성모당을 자주 찾는다. 말하자면 대구 남산동은 대구 근대 종교의 탄생지이다. 

대구에서 구속·석방 반복…절정의 시인으로 성장

이육사 시인은 대구 남산동에서 어떻게 성장할까? 남산동으로 이사 온 이육사 시인은 이때만 하더라도 명성이 자자하지 않았다. 그는 대구에서 문인이기 이전에 식민지 조선을 아프게 고민한 지역 청년이었다. 대구로 이사 온 이육사 시인은 그의 활동 반경을 중국 북경으로 넓힌다. 북경에서 활동하는 대구 경북 동향 출신의 독립지사들과 교류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절정의 시인이 될 준비를 대구에서 하고 있었다. 

이러던 이육사 시인이 대구 감옥에 갇힌다. 1927년 그의 나이 23세의 나이에 지금의 대구 중앙로에서 벌어진 장진홍 의거에 모함받아서 그렇다. 본래 이육사 시인은 이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그러나 이육사 시인과 그의 형제들은 일제 경찰로부터 불량한 조선인으로 지목된 상태였다. 이육사 시인은 대구 감옥에서 1년 6개월을 갇힌다. 몇 개월이 아니다. 1년 6개월이다. 

그런데 이육사 시인의 대구 투쟁이 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1930년 26세가 되는 해에는 대구 청년동맹 간부라는 이유로 구속된다. 1931년에는 대구 격문 사건으로 구속된다. 이육사 시인은 대구에서 구속과 석방을 반복하며 절정의 시인으로 성장한다. 이육사 시인의 대구 남산동 집은 아파트 재개발로 인해 지금은 철거된 상태이다. 그가 갇힌 대구 감옥 터에는 삼덕교회가 성업 중이다. 대구 청년 이육사가 자주 출입한 조양회관은 본래 자리에 있지 않다. 이육사 시인의 대구 시대를 증명하는 게 쉽지 않다. 

이육사 시인의 대구 남산동 생가 터(대구 중구 남산동 662-35번지). 주소지 일대에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이 집은 철거되었다. 사진=양진오

이육사 시인의 대구 시대를 물리적으로 복원할 수는 없지만 그가 남산동과 일대에 남긴 빛나는 스토리는 충분히 복원될 수 있다. 이육사 시인은 식민지 최고의 저항 시인으로만 정의되지 않아야 한다. 그의 대구 시대도 이야기되어야 한다. 이육사 시인만 그러할까. 이육사 시인을 포함하여 이 땅에서 치열히 살다 간 사람들의 삶에서 지역이 정밀하게 이야기되어야 한다.

양진오 대구대 교수·한국어문학과
한국 현대문학과 스토리텔링을 가르치고 있다. 대구 원도심에 인문학 기반 커뮤니티 공간 ‘북성로 대학’을 만들어 스토리텔링 창작, 인문학 강연 및 답사, 청년 창업 컨설팅 등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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