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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세평]“이녁, 무사 경 난리라?”
[신문로세평]“이녁, 무사 경 난리라?”
  • 김영명 한림대
  • 승인 2001.05.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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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28 16:04:16
지난 3월 정부 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발족된 민주당 국제자유도시 정책 기획단(단장 이해찬)이 최근 작성한 ‘제주국제자유도시 개발 전략 및 마스터플랜’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 도민의 영어 능력 향상을 위해 영어의 제2공용어화, 외국어 학교 설립, 외국 대학의 분교 설립 등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하여 이는 언어의 사회적 기능과 중요성에 대해 무지한 개발론자들의 시장 논리(실제로는 시장 ‘강요’라는 ‘비’시장논리)의 반영일 뿐이다. 학교를 엉망으로 만든 이해찬이라는 이름이 여기 또 등장한다는 사실이 매우 뜻깊다.

이 안은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이 안을 실제로 집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고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혼란과 비효율, 그리고 계층간 갈등만 증폭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외국인과 관계없는 대부분의 공문서에 영어를 병기한다? 무슨 정신병자의 망발인가. 외국인 관광객이나 투자자와 관련 없는 대부분의 제주도민들은 영어를 잘 할 필요가 없다. 이들에게 영어 교육을 강화한답시고 불필요한 인력과 재원을 낭비하게 될테니, 이에 따른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외국인과 관련 없는 공무원이나 교사, 각종 직원들이 필요 없는 영어 공부 때문에 입게 될 돈의 낭비와 심리적 압박, 심지어 모욕감은 전혀 필요치 않은 사회적 낭비일 뿐이다.

또 학교 교육에 영어의 비중을 크게 늘리고 몇몇 과목들은 영어로만 진행하라고 강요할텐데, 그럴 교사도 없고 학생도 없는 상황에서 이 또한 낭비와 갈등만 증폭시킬 것이다. 제주도민은 특별 국민으로서 다른 도들과는 다른 별개의 교과 과정을 짜야 할 것이고, 이 과정에서 국어와 국사 교육은 필경 축소될 것이다. 제주도민은 ‘준’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제자유국인 ‘탐라국’ 주민으로 돌아가야 할지 모른다.

국제화 시대라 영어를 잘 하면 좋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국제자유도시’라고 해도, 왜 모든 도민들이 영어를 잘 해야 하는가. 오히려 지금 제주도를 찾는 주요 외국인들인 중국과 일본 사람들을 위해 관광 종사자들에게 중국어와 일본어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더 급하다. 또 영어가 필요한 관계자들을 집중 교육하면 될 일이다.

게다가 영어를 공용어로 하면 외국인 관광객과 투자자가 몰려들 것이라고 누가 예측할 수 있는가. 외국 관광 갈 때 안내인 아닌 자신의 의사 소통 가능성을 얼마나 고려하는가. 우리가 영어가 안 되어서 외국인 투자가 안 들어온다고 누가 증명한 적이 있는가. 이것은 그야말로 지엽말단적인 요인에 불과하다. 표지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이미 도로표지판과 주요 기관들에는 한글과 로마자, 영어가 병기되어 있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시골 초등학교 분교나 면사무소의 간판에도 영어를 써야 한다는 말인데, 쓸데없는 데 머리 쓰지 말고 민생고나 잘 해결해 주기 바란다.

낭비와 비효율보다 더 큰 문제는 영어 공용어화 정책이 결국 국어를 죽이고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는 데 있다. ‘국제자유도시안’이 이상으로 삼는 기준이 싱가포르나 홍콩인데, 이 두 도시는 식민지였거나 조차지였던 곳이다. 제주도를 이와 같은 조차지로 자진하여 만들자는 것인데, 이는 몇 푼의 개발이익을 위해 민족 문화와 언어를 팔아먹자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실상 제주도든 어디든 한국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몇몇 귀화자를 빼고는 영어를 모어로 쓰는 한국인이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추진하는 것은 일종의 부분적인 영어 공용어 안인데, 아마 찬성론자들은 그 정도야 어떠랴 하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영어의 압박 속에서 한국어가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는 현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다. 법으로 영어에 날개를 달아주면 제주도민의 언어는 머지않아 ‘피진’어처럼 되고 말 것이다. 영어도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얼치기 한국인, 얼치기 국제인이 제주도민의 이상이란 말인가.

그런데 제주도의 여론을 주도하는 유지들이나 언론은 이 안에 찬성하는 모양이다. 개발 수익을 노리는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나, 이 또한 무지에서 나온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이들은 ‘국제도시가 되려면 영어를 해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도민 모두가 관광 도우미나 외국 회사의 현지고용인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야 제주도가 발전한다는 것인데, 이는 외국인과 손잡고 서민들 위에 군림할 지역 유지들의 자기이익을 반영할 뿐이다. 영어 공용어 정책이 시행될 때 나타날 계층간 위화감의 증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제주도 영어 공용어화는 안 해도 되고, 제대로 안 될 것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해서는 안 된다. 제대로 시행되지도 못하면서 언어 혼란, 국어 쇠퇴, 그리고 계층간 갈등만 불러올 이런 망상은 당장 집어치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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