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초쯤 현상공모해 1월1일 각 장르별로 당선작을 쏟아내는 ‘신춘문예’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등단제도다. 1925년 조선일보가 시작한 이 제도는 80년의 역사를 쌓는 동안 한국의 문화인들이 매년 초 겪는 하나의 정신적 홍역이자 통과의례의 성격을 획득해왔다.
그러나 요즘 신춘문예를 통해 새로운 시대정신이나 문학정신을 기대하는 사회심리는 상당히 약해졌다. 신춘문예의 판을 다시 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문학 전체를 향한 덧없음의 표정, 신뢰상실의 풍경은 그 뿌리가 만만치 않게 깊어보인다. 그런 점에서 신춘문예에서 어떤 경향을 읽어내려는 비평적 시도는, 글쓰기의 동기와 윤리성을 규명하고 비판하는 것에 특히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선정 근거 모호한 심사평
올해 신춘문예의 두드러진 현상은 젊은 층의 응모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언론은 대졸실업자의 증가를 원인으로 제시한다. 여기에 한 가지를 보태면 인터넷 문학활동의 제도화가 이뤄지면서 글쓰기의 상향평준화가 이룩된 점이다. 하지만 ‘당선권’의 작품이 많아 물건 고르기가 힘들다는 푸념이 행복해 보이진 않는다. 올해 소설은 그 소재에서 전망없는 삶과 그것에 대한 잔혹 묘사가 거침없이 쏟아졌다. 시 분야는 예년과 비슷했는데 가족사의 한 귀퉁이, 이사·제사·술추렴 등의 일상, 노숙자, 전쟁 등에 대한 비판적 관찰이 보였다.
평론에선 약간 이채로운 사건이 있었다. 우선 중앙일간지 당선작 5편 가운데 3편이 천운영이라는 젊은 작가에 대한 글이었다는 점이다. 그 다음 고려대 국어교육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강유정 씨가 문학(2)·영화평론(1)으로 3관왕을 낚았다는 점도 화제를 낳았다.
신춘문예에서 ‘수준’과 ‘완성도’를 논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작품들의 짜임새나 미적 완결성에 대해 지적을 하는 것은 자칫 너무 과도한 것을 바라는 것일 수 있다. 다만 문학 외부자의 시선에서 봤을 때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어떤 관습이나 합리화 같은 점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기가 힘들다.
시에선 30대 중반 이상의 당선자들이 압도하면서 ‘노령화’의 경향을 이어나갔다. 심사위원들은 대개 본질에 대한 통찰, 언어를 다루는 숙련도, 사물을 보는 새로운 시각, 고른 완성도를 요구했고 그에 부합하는 시들이 제출됐다. 그러나 ‘심사평’과 ‘시’가 불일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세계일보의 당선작 ‘母女의 저녁식사’는 채소로만 차려진 저녁식탁→말(馬)→아마존의 여전사→유방암 앓는 어머니를 연결시키는 연상에서 사물을 보는 새로운 시선을 높이 샀다고 하는데, 전혀 새롭지 않을 뿐 아니라 감정이 질펀해서 읽기조차 불편했다. 동아일보의 당선작 ‘단단한 뼈’도 “마지막 울음과 비틀어진 웃음을 분리하지 않고 수거했다”는 표현이 “비극적 삶의 전력에 대한 암시”라고 고평하지만 문맥을 아무리 살펴도 그 뜻을 알 수 없는 애매한 표현일 뿐이라는 느낌이다. 한국일보의 ‘나무도마’는 존재의 힘겨움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고 하지만, 나무도마와 칼의 관계를 묘사한 이윤학의 시와 유사할 뿐 아니라, 긴장감이 없는 묘사였다. 차라리 익숙하게 조탁된, 투명하지만 철저히 외재적 운율로 승부를 본 조선일보의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에 대한 심사평이 솔직하다. “가장 시를 오래 쓸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골랐다는 자조가 말이다.
이번 당선작들은 한마디로 ‘내재율’이 없었다. 예리한 고통도, 초월과 반전도 전무했다. 시가 무엇인지 내적으로 겪어보지 못한 내면에서 만들어진 시들을 당선작으로 뽑는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평론가 김현이 유고집 ‘행복한 책읽기’에서 부끄럽게 남겨놓은 자작시보다 훨씬 더 시 같지 않은 이 작품들에서 뭘 기대할 수 있을까.
▲만약 심사위원들이 좀더 세심히 시대와 불화하려는 정신을 발굴하고자 했다면, 평론가 지망생들이 천운영이라는 작가에 손쉽게 접근한다는 점을 알아차렸으리라. 왜냐하면 천 씨의 소설은 그녀도 인정하듯 이론으로 요리하기가 아주 좋은 이른바 꽃밭에서 노니는 듯한 글읽기를 제공하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 |
소설 분야에서는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시사프로그램에서 발동된 상상력으로 소설이 만들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특히 한국일보의 ‘피’는 닭 한마리를 손질해서 50원을 받는 각박한 삶이라는 소재 외에는 ‘手記’만큼 거칠고, 그보다 진실성이 떨어졌다. 동아일보의 ‘가위’, 문화일보의 ‘유령’, 서울신문의 ‘빛이 스며든 자리’는 나레이터가 읽어주는 듯한 소설로 “현대인의 소통불능을 잘 드러냈다”는 평을 받았는데 왜 이런 작품을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들만큼 창작 동기가 희미해 소설을 쓰기 위한 소설이라는 허무한 느낌을 줬다.
경향신문의 ‘마더’와 세계일보의 ‘오프라인’은 확실히 주목할 만한 삶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었다. ‘마더’의 경우 자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과, 자살을 결심한 이후에 나타나는 인간행동의 변화를 마치 직접 경험한 것처럼 표현해 섬뜩함을 안겨주었다. ‘오프라인’은 올 신춘문예가 거둔 가장 뛰어난 성과로 보여지는데 소설가 이외수 밑에서 사숙했다는 당선자는 수제인형 인터넷몰을 운영하는 젊은 여주인공을 통해 시대의 풍경과, 한국 청년의 내면을 느끼게 해줬다는 점에서, 인터넷에 의지해 독립군으로 살아가는 직업계층의 한 유형을 거의 빈틈을 찾아볼 수 없게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현실에 적응하는 인간을 과장되지 않게 보여줬다는 점에서 매혹적이었다.
3관왕을 배출한 평론 당선작들은 무척 고역스럽게 읽었다. 우선 경향신문, 문화일보, 서울신문에 당선된 ‘천운영론’은 허탈할 정도로 작품을 왜소화시키는 전형적인 지식평론이었다. 왜 그런가. 일전에 김윤식 교수가 내린 문학비평에 대한 정의를 보자. “작품을 이해, 비판하기 위해서는 자신 속에 그 작품을 재현해야 하고 그 순간 미적 판단이 창조적 예술과 하나가 된다”라고 老 교수는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위의 세편은 비평의 첫 번째 단계인 비평가의 내면에 작품을 온전히 담아내는 일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논술,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닌 비평
세편 모두 여성, 몸이라는 키워드를 통해서 천운영의 단편들을 기워나가는데, 이는 실을 짜는 신화 속의 여인 페넬로페의 자폐성을 연상시켰다. 이 평문들은 90년대까지의 문학에 나타난 여성과 남성의 관계, 몸과 섹스, 성에 대한 관념을 뒤짚어 엎는 전복적인 소설로 천운영의 작품을 틀 지운다. 그러나 ‘바늘’, ‘명랑’, ‘아버지의 엉덩이’ 등 천운영 소설은 파괴적이기보다는 우리 주변에 있음직한 크고 작은 비극들과 비극 속에서도 있기 마련인 희극을 상상력과 인간애의 오지랖을 넓혀가면서 잘 짐작해낸 秀作이다. 정신분석학과 페미니즘에 의존하지 않고도 음미될 만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들 평론이 ‘문학’의 하위 장르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의문을 부른 대목은 소설의 주인공이 가장 아파하는 순간에도 비평가는 스스로의 시나리오가 완성돼 가는 기쁨에 젖어 쾌재를 불러댄다는 것이다. 연민을 모르는 비평, 작품에서 받은 미적 충격 하나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하는 鈍才의 글쓰기가 아닐 수 없다. 작품을 비판적으로 대면하려는 자의식은 전혀 없고, 작가가 던져준 미끼를 물고 미로를 더듬어가는 수능 논술시험장의 熱氣 같은 것이 대학교수인 심사위원들에 의해 비평의 ‘패기’라고 인정되는 현실이 약간 서글픔까지 안겨줬다.
이번 비평 분야 심사평 가운데 이해되지 않는 구절들로는 "대상 작품이 1편이 아니고 2편이라서 아쉽다"는 평가와 "대상작품이 1편인 점이 아쉬웠다"는 평가가 동시에 등장했는데 작품 편수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도 이해되지 않는다. 작품 선정의 부적절성을 문제삼을 수는 있지만, 작품선정에 문제가 없다면 다루는 작품수가 한편이든 두편이든 내용을 이끌어내는 책임은 온전히 비평가의 몫이기 때문이다. 만약 심사위원들이 좀더 세심히 시대와 불화하려는 정신을 발굴하고자 했다면, 평론가 지망생들이 천운영이라는 작가에 손쉽게 접근한다는 점을 알아차렸으리라. 왜냐하면 천 씨의 소설은 그녀도 인정하듯 이론으로 요리하기가 아주 좋은 이른바 꽃밭에서 노니는 듯한 글읽기를 제공하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에 ‘생의 저인망식 구인-이성복론’으로 등단한 조강석 연세대 강사의 글은 올해 신춘문예에서 유일하게 비평적 감수성을 보여준 글이었다. 이성복 시인의 최근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刊)을 “삶은 난감한 것이다→너는 눈이다→초월이냐 경계냐→왜 이렇게 가슴 뛰느냐고→동곡엔 가지 마라”의 소제목의 순서로 짚어나가는 조 씨의 글은 문체의 파도를 높였다 낮췄다 하는 스스로의 호흡에 대한 예민한 감각, 시인과 작품을 번갈아 호출하며 비평적 시야를 확보해나가는 등 부드럽게 결론으로 골인하는 매우 인간적인 글이었다.
그는 당선소감에서 “송년회 자리에서 선배에게, ‘형, 나는 문학이 좋아요…’라는 말을 열없게 되풀이했던 기억도 납니다. 이 말을 주문처럼 외곤 하는데 나를 떠밀던 처음의 그 바람에 몸을 싣기만 하면 무사하던 때, 그 처음의 바람이 여전히 불어주고 있는지 늘 궁금해서입니다”라고 말했다. 30대 중반에 접어든 文靑의 고백, 그것이었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시를 쓰기 위해 고생했을 신인시인들인데, 비평의 수준이
마구잡이로 막말을 하는 것 밖에 안됩니다. 최소한은
비평이 무엇인 줄 알고 글을 올려야 하는 일 아닙니까?
사회적 엘리트라 불려야 할 기자분이 그것 밖에 안됩니까?
참 철이 없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