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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전달했던 1980년대
‘토론’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전달했던 1980년대
  • 강치원
  • 승인 2021.06.22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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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치원의 ‘원탁토론 운동 30년, 내가 얻은 교훈 그리고 미래 교육’②

 

강치원 호서대 특임교수

내 평생 고질병과 트라우마의 가해자는 누구인가? 1980년 겨울, 나는 촉탁직원으로서 고대신문사 간사를 맡게 되었다. 그래서 비상계엄 하에서 신문을 제작해 보았다. 신문, 방송, 통신, 잡지 등 언론은 사전 검열을 받는다. 신문을 찍기 전에 신문대장 두벌을 들고 서울특별시청에 있는 계엄사 보도검열본부에 간다. 

내 기억으로는 중령 계급의 보도검열관들이 신문대장을 꼼꼼히 읽으면서 빨간 색연필로 표시한다. 기사를 줄이거나 일부를 삭제하고, 제목 활자 크기를 바꾸고 논조를 고치며, 만평을 수정하고 단어를 바꾸도록 지시한다. 예컨대 ‘노동’이라는 단어는 ‘근로’로 바꾸어야 한다. 

검열필이라는 도장을 받기까지 몇 차례 들락거리기도 했다. 계엄사 보도검열본부의 외부 검열과 주간 교수의 내부 검열이라는 이중 검열 하에서 검열과 대학생 기자들 사이의 중재 역할을 하는 것이 간사의 업무였다. 

제11대 대통령 전두환 씨가 제12대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으로 기억한다. 대한민국 총무처가 관보와 공문을 통해서 전두환 대통령을 표기할 때 全 자를 “入 들입 자 아래 왕 王”으로 쓰지 말고 “人 사람인 자 아래 왕 王”으로 쓰도록 시달한다. 전두환은 사람의 왕이라는 뜻일까? 그렇게 하면 제11대에 이어 제12대 대통령이 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을까? 옥편에 없는 한자의 글자도 한 마디 지시로 바꾸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 전두환 씨의 발상이었다. 그때는 신문이건 책이건 가능하면 한자를 쓰던 시절이다. 특히나 인명과 지명은 한자로 표기했다.  

당시 인쇄에서 글자를 바꾸기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신문제작 과정이 오늘날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신문제작을 위해서는 우선 기자들의 기사 원고의 조판 작업을 거쳐 신문 대장을 완성한다. 그 다음 신문지형을 뜨고 납판을 만든 후 윤전기를 돌려 신문을 찍는다. 그래서 납 활자를 뽑는 채자공들과 납 활자를 심는 식자공들의 수고를 거치지 않고는 신문을 발행할 수 없었다. 신문사에는 다양한 포인트 크기의 수많은 납 활자들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 수많은 全 자 납 활자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 나는 대학 강단에 서면서부터 수업시간에 학생들을 참여시켰다. 질문과 대답, 토론 등으로 말이다. 그것이 역사의 실천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중반에는 대학의 교양강좌의 경우 수백 명의 학생들이 수강했다. 마이크를 잡고 강의하던 시절이다. 계단식 대강당에서 뒷줄에 앉아 있는 학생들은 주의가 산만하기 마련이다. “뒤에서 두 번째 줄 빨간 티셔츠 입은 학생, 이제 금방 앞줄 학생 질문에 대답해 보겠어요?” 대강당은 금세 조용해지고 학생들은 집중한다. 수강생 중에 정보 프락치가 있다는 소문이 돌던 시절이다. 

대강당 복도의 벽에는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표어가 붙여졌다가 떼어지고 떼어졌다가 또 붙곤 했다. ‘역사란 무엇인가?’ 수업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강의하기가 조심스러웠다. 학생들로 하여금 질문과 대답에 참여하게 하고, 토론하게 함으로써 내가 하고 싶을 말을 전달했다. 훗날 보니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 강의방식과 유사한 방식이었다.(계속)

강치원 호서대 특임교수 / 원탁토론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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