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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기획] 번역과 전통의 의미
[번역기획] 번역과 전통의 의미
  • 이옥진 기자
  • 승인 2001.05.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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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15 18:35:40

“번역은 끊임없는 인류의 해석학적 행위이다.” 도올 김용옥이 지난 1989년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제기한 이 ‘영원한 번역론’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흔히 공간의 차이를 옮기는 것으로 번역이 임무를 다한다고 여기지만, 시간차를 견뎌내는 것 또한 번역이 감당해야하는 중책이다. 동양학과 국학이 흔히 번역논의에서 간과되는 것도 바로 그 두 번째 중책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빈약 때문이다.

도올이 지적한대로, 중국학 연구성과가 중국보다는 영미유럽에서 오히려 탁월하다는 아이러니는 이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다. 서구가 중국고전번역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중국은 그들의 과거를 현재로 번역해내는 작업에 소홀했던 것이다. 문자의 기표와 音價에 우리의 눈과 귀가 익숙해지면 기의변화를 읽어내는 데는 둔감해지기 마련이다.

기의변화를 다시금 기표의 영역으로 옮겨내는 발빠른 대응이 절실하다. 단일한 문자문화권, 혹은 언어문화권 내에서 전통이 현대로 변용되려면 ‘완전번역’이 활성화돼야 한다는 대다수 한문학자들의 주장은 그러므로 설득력을 지닌다. 박원재 고려대 강사(한문학과)는, ‘‘장자’는 왜 번역되어야 하는가’(‘오늘의 동양사상’ 2호)에서 중국학문헌들이 ‘완전번역’의 미답지로 남게되는 습속을 설명해낸다. “특수한 역사적 환경에서 구축된 한문과 우리 문화 사이의 친화성”이 그 원인이다. 그 탓에 “한문은 분명히 중국어라는 외국어를 표현하는 문자 체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언어 문화 속에서 자국어를 표기하는 문자 체계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는 기묘한 위상을 차지해왔”던 것이다. 박 강사에 따르면 가령, ‘장자’에 등장하는 ‘心齋’를 그저 ‘심재’라고 옮겼을 때 문자적 감응에 실패한 번역일 뿐이다. 실로 “한문 원전의 번역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전통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이전의 번역자가 마침표를 찍은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는 ‘맹자’와 현대 한국인의 만남은 언제?’(‘오늘의 동양사상’ 4호)에서, “번역자들은 한문실력만큼이나 기존의 학문적 연구성과를 부단히 반영하여 재판에 재판을 거듭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완곡하게 제안한다. 동양학의 중요한 고전들에는 이미 수십가지의 번역판본이 따라붙기 마련이지만, “저마다 ‘新’과 ‘完’을 내세우기에 앞서” 거대한 수고의 총체인 번역판본들이 그만큼의 문화적 위력을 생산하지 못하는 실정 때문이다.
부실한 번역작업으로 인해 과거의 학문적 성취가 현대를 설명해내는 틀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도올 김용옥의 지적처럼 “서양인들 자신이 자성적으로 동양을 보다 깊게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동양에 역수입돼 동양인 자신의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서구학계가 동양학 고전 번역을 통해 확보한 정보량과 학문적 성취가 놀랄만하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다른 예로, 조셉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은 서구인들에게 중국과학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킨 저서로 평가받고 있다. 이 관심은 결국 동아시아인들사이에 중국과학사를 유행시켰다. 유교와 노장사상이 이토록 큰 파장을 지니는 것 또한 서구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학인들의 활동에 일부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동양학의 고전들이 ‘서구사상의 몰락’에 회생의 계기를 마련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공자와 장자들’이 서구의 사고에 전환을 이끌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특기할 것은, 그 동안 고전들은 이곳 서가의 먼지 속에서, 혹은 생기 잃은 번역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 ‘옛’ 동양학이 알파벳이라는 ‘새’ 옷을 입고 속속들이 귀향하고 있다.

어느새 한자보다는 알파벳에 익숙해버린 우리들에게 이들 서구를 거쳐온 동양학의 매력은 한층 커질 것이고, 이들 문헌으로 인해 독자들은 오리엔탈리즘의 내면화에 노출될지 모를 일이다. 동양학이 서구의 해석학적 맥락을 얻어 현대화된 것이야 문제가 될 리 만무하지만, 그것이 단 하나의 해석으로 독자들에게 인식된다면 동양학의 미래란 암울하지 않겠는가. 다시, 서고를 열고 동양학과 국학문헌 번역작업을 재촉하여 이 땅의 바람을 쐰 해석의 결을 쌓아가야 할 때이다.
이옥진 기자 zo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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