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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곡 작가 “하루 2시간 자고 일하다 과로사 한 택배기사…우리는 과잉존재들”
김곡 작가 “하루 2시간 자고 일하다 과로사 한 택배기사…우리는 과잉존재들”
  • 김재호
  • 승인 2021.06.23 08: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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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_ 『과잉존재』(한겨레출판사 | 184쪽) 쓴 김곡 작가

 

과로의 원인은 언제 일을 중단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

과몰입과 과흥분으로 과열된 순삭의 디지털 네트워크 사회 

“이번 세기, 과몰입과 과흥분만이 생존법칙이다. 비트코인도 과잉현상이다.” 지난 14일, <교수신문>과 인터뷰에서 김곡 작가는 이같이 말했다. 그는 최근 한국사회에 문제가 되고 있는 과잉현상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파헤쳤다. 인터뷰가 있기 전날에도 한 택배기사가 주평균 80시간 노동을 하다가 과로사했다. 택배기사는 하루 2시간 정도만 잠 자고 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작가는 “무한경쟁 체제와 플랫폼 자본주의가 안착되어 노동자 개개인이 CEO가 되어버린 오늘날, 짜장면 배달부도 1인 기업이고 자기 자신의 CEO”라고 말했다. 『과잉존재』에서 김 작가는 “과로의 핵심은 더 많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더 하고 덜 하는지 모르도록 하는 데에 있다. ‘칼퇴근’이란 말은 우리가 더 이상 경계 긋는 칼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지시한다(27쪽).”라고 적었다. 

김곡 작가는 너무 많은 게 문제가 아니라 많고 적음을 구분할 수 있는 경계의 부재가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사진=김재호

언젠가부터 한국사회는 24시간 네온사인이 켜지며 낮과 밤의 경계조차 희미해졌다. 이로 인해 과로사, 과잉진압,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공황장애, 경계선 성격장애나 조울증, 묻지마 범죄 등이 성행하고 있다. 그래서 경계짓기가 중요하다. 김 작가는 “과잉은 수량이나 수치가 아니다. 과잉은 경계의 철폐다(12쪽).”라고 적었다.

김 작가는 디지털로 점철된 과잉 네트워크 사회가 ‘저항=0’이라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저항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는 “저항감각이란 육체 밖에 무언가 육체와는 다른 물체가 있음의 증명”이라면서 “그런데 네트워크에선 그런 저항감각이 모두 소실된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김 작가는 “저항 없이 친구가 되고, 저항 없이 친구 차단을 하며, 저항 없이 업데이트하고 아웃데이트한다. 무엇보다도 저항 없이 ‘좋아요’ 한다”라며 “마우스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조차 저항감에 의한 것이 아니다. ‘좋아요’ 한 번 누르는 데는 1초도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온라인의 저항감 소실이 오프라인까지 확대된다는 점이다. 

경계와 저항감이 소실된 과잉 네트워크 사회

김 작가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8년까지 1천512명이 과로로 죽었다. 이 통계는 산업재해로 인정된 수치다. 2019년 과잉행동장애를 치료하는 메틸페니데이트 처방받은 이가 13만4천명, 공황장애 환자는 60만 명으로 추산된다. 여기서 ‘과잉과 충동의 패러다임’을 지닌 새로운 주체가 발견된다.

책을 쓴 계기에 대해 김 작가는 2015년 인천 어린이집 아동학대 사건을 언급했다. 일명 ‘핵싸대기’란 제목으로 인터넷에 유출된 CCTV 영상이 사회에 큰 충격을 줬었다. 김 작가는 “어린이집 교사가 반찬을 남겼다는 이유로 4살 아이의 뺨을 후려치고 있었다”라며 “세게 때린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아이가 나가떨어졌는데도 교사는 본체만체 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훈육이 목적이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김 작가는 “최근 아동학대엔 훈육이라는 목적성 자체가 관찰되지 않는다. 아예 타인을 목표로 하질 않는다. 자기 화풀이, 자기 기분 외에 다른 목적이 없는 것이 요즘 아동학대의 특징이다”라며 “애초부터 타인의 훈육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의 기분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목적 없는 폭력엔 경계도 없다”라고 비판했다. 자기의 과흥분 상태에 경도되는 상태에 대해 김 작가는 “오늘날 아이들은 규율의 희생양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의 희생양이다. 나르시시즘은 과잉주체의 가장 큰 특성”이라고 꼬집었다.  

김 작가는 이미 『관종의 시대』(그린비, 2020)을 통해 존재와 관심을 맞바꾼 관심과잉을 지적한 바 있다. 이번 책과 더불어 김 작가는 노동, 소비, 휴식, 소통, 관계 등이 폭주하는 시대에 타인을 직접 만나고 혼술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타인을 만나는 훈련으로 대상에 대한 저항감과 신뢰감을 키워가라는 뜻이다. 이후 작업에 대해 김 작가는 “두 책 모두 ‘육체가 가장 근원적인 타자’임을 전제하고 있다. 그 근원적인 전제를 살펴보고 싶다”라며 “지난 세기에 나와 타자 사이에서 벌어지던 전쟁이 오늘날 어떻게 나의 육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고 답했다. 

한편, 김 작가는 쌍둥이 동생인 김선과 함께 영화감독으로도 활동 중이다. 올해 개봉 예정인 영화는 변요한, 김무열, 김희원 배우 등이 출연한다. 영화의 제목은 「보이스」이다. 김 작가의 철학이 영화에 어떻게 담겨졌을지도 매우 궁금하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책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한편, 조금은 어렵기도 하다. "과잉과 충동의 패러다임'이라는 새로운 주체를 드러내, 즉 책을 내신 계기나 동기가 무엇인가.

2015년 인천 어린이집 아동학대 사건이 계기였습니다. 일명 ‘핵싸대기’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유출된 CCTV 영상엔 어린이집 교사가 반찬을 남겼다는 이유로 4살 아이의 뺨을 후려치고 있었습니다. 세게 때린 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이가 나가떨어졌는데도 교사는 본체만체 하고 있었습니다. 애초부터 훈육이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죠. 

과거 체벌과 최근 아동학대는 결코 같지 않습니다. 물론 과거 체벌은 더 가혹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엔 적어도 훈육이라는 목적성이 있었고, 그래서 ‘타인의 굴복과 순종’이라는 목적이 달성되면 체벌은 멈췄습니다. 목적(end)이란 행위의 끝을 뜻합니다. 목적이 달성되면 행위는 끝납니다. 그러나 최근 아동학대엔 이런 목적성 자체가 관찰되지 않습니다. 아예 타인을 목표로 하질 않습니다. 자기 화풀이, 자기 기분 외에 다른 목적이 없는 것이 최근 아동학대의 특징입니다. 목적이 없는 행위는 멈출 줄도 모릅니다. 아마 저 어린이집 교사는 아이가 반찬을 다 먹었어도 다른 이유를 찾아서라도 또 때렸을 겁니다. 애초부터 타인의 훈육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의 기분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적 없는 폭력엔 경계도 없습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규율의 희생양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의 희생양입니다. 나르시시즘은 과잉주체의 가장 큰 특성입니다. 

△“과잉은 수량이나 수치가 아니다. 과잉은 경계의 철폐다.”(12쪽)라고 적었는데, 과몰입과 과흥분이 없기 위한 적절한 상태 혹은 그 기준은 무엇인가? 그랬던 적이 있었을까. 

‘계급’이 이미 그런 경계선입니다. 과거 모든 저항운동은 나와 타아, 친구와 적의 분별을 전제로 했습니다. ‘노동자’라는 관념도 ‘자본가’를 판별해내는 경계선이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사회에 받아들여졌습니다. 당시엔 경계가 통용되는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런 경계감각은 더 이상 보편적 감각이 아닙니다. ‘자본가’가 ‘CEO’란 워딩으로 대체되어서만은 아닙니다. 무한경쟁 체제와 플랫폼 자본주의가 안착되어 노동자 개개인이 CEO가 되어버린 오늘날, 짜장면 배달부도 1인 기업이고 자기 자신의 CEO입니다. 

경계가 있다는 건 타자의 판별이 가능하단 뜻입니다. 그래서 전략도 존재했습니다. 지난 세기 과몰입과 과흥분을 억제한 것은 전략입니다. 그러나 경계가 사라지면 타자도 전략도 사라집니다. 적어도 불필요해집니다. 이번 세기, 과몰입과 과흥분만이 생존법칙이 됩니다. 비트코인도 과잉현상입니다. 그것은 정확히 조울증의 패턴을 따릅니다. 거기엔 떡상과 떡락의 경계가 없습니다. 

△“경계를 지킨다”(13쪽)라고 적었는데, 경계를 지켰던 실존주의자나 자유주의자, 프롤레테리아는 결핍이나 억압을 초월적 의지로 극복한 게 아닐까? 책에 표현됐듯이, 일종의 '몸부림'이었나.

경계는 언제나 양면적입니다. 지배자가 강요하며 주체를 속박하는 경계가 있는 한편, 속박된 주체가 탈환하거나 새롭게 건설하려는 경계도 있습니다. 둘은 일치하기도 하고, 또 불일치하기도 합니다. 

‘초월’이란 주체에게 강요되어 그를 속박하던 경계를 넘는다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 그 목적 또한 새로운 경계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다시 프롤레타리아를 예로 들어 본다면, 그를 가두던 공장벽이라는 속박적 경계를 넘어서,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경계선을 건설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초월’은 경계를 지키려고 경계를 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초월’조차 불가능해졌다는 겁니다. 초월할 경계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허용되는 유일한 ‘초월(transcendence)’은 ‘변형(transformation)’뿐입니다. 변형은 타자 눈치를 안 보고도 경계를 철폐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성형수술이 그렇습니다. 

△과잉행동장애 처방 받은자 13만4천명, 공황장애 환자 60만명, 과로사 1천512명 등 사회 병리 현상을 분석한 점이 눈길을 끈다. 다만, 이런 현상이 일부분이고, 중용과 경계를 지으려는 개인이나 집단 역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존재합니다. 하지만 아주 어렵게. 

‘중용의 미학’이 오늘날 유행하는 것은 그만큼 이 사회가 중용을 잃고 있음을 반증합니다. 오늘날 중용을 학살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병리현상으로 ‘경계선 성격장애’를 꼽고 싶습니다. 경계선 장애는 자아를 통합할 수 있는 경계가 결여되어 타인을 ‘좋은 것’과 ‘나쁜 것’만으로 나누어 인지하는 질환입니다. 그래서 타인이 좋을 때는 그에게 끊임없이 매달리고 순종하다가도, 조금이라도 타인이 떠나거나 거절의사를 내비치기라도 하면 돌발적으로 변해 타인을 비난하고 증오하며 공격합니다. 물론 경계선 성격장애는 임상적인 범위를 기준으로 특정되는 증상입니다. 하지만 저 범위를 조금만 넓히면, 오늘날 우리 모두가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입니다. 

경계선 장애의 가장 큰 정서적 특징은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버려질까 두려워 매달리다가도, 버려질 것만 같으면 버렸다는 이유로 비난하고 공격합니다. 즉 경계선 성격장애는 ‘타자에 대한 믿음’, 좀 더 정확히는 ‘타자는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이 결핍되어 초래되는 질환입니다. 그래서 그 치료는 ‘타자가 저기 분명히 있다’, ‘타자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지만, 언제나 거기 있다’는 관념을 인지시키는 과정으로 이뤄집니다. 

중용의 미학으로 경계선 성격장애를 치료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중용은 혁명적입니다. 내 안에서의 평온만이 아닌, 타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회복했다는 뜻일 테니까요. 

△과잉사회(네트워크)에서 '저항=0'인 점을 비판했는데, 그렇다면 저항의 가능성은 얼만큼 있나. 

저항감을 회복하는 만큼 있습니다. 

우리가 길을 걸을 때, 밥을 먹을 때, 심지어 잠을 잘 때조차, 우리 육체는 저항감을 느낌으로서 살아갑니다. 발은 대지를 딛고, 숟가락으로 밥을 퍼올리고, 누웠을 때조차 등은 바닥을 느낍니다. 저항감각이란 육체 밖에 무언가 육체와는 다른 물체가 있음의 증명입니다. 

그런데 네트워크에선 그런 저항감각이 모두 소실됩니다. 저항 없이 친구가 되고, 저항 없이 친구차단을 하며, 저항 없이 업데이트하고 아웃데이트합니다. 무엇보다도 저항 없이 ‘좋아요’ 합니다. 마우스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조차 저항감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좋아요’ 한 번 누르는 데는 1초도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저 저항감의 결핍이 오프라인까지 전염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날 묻지마 범죄나 ADHD의 창궐은 이와 결코 무관치 않습니다. 오늘날 더 이상 연쇄살인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연쇄살인엔 너무 많은 인내와 저항감각이 필요합니다. SNS는 연쇄살인의 멸종에 기여합니다. 

△SNS와 하이퍼링크로 인해 양극성 분열이 생기고, '진짜 나'가 쪼개진다고 했다. 여기서 진짜 나란 어떻게 정의 가능한가? 대상의 저항감과 신뢰감을 가진 외로운 나인가.

진짜 나를 확인하는 방법은 쉽습니다. 위니콧은 ‘진짜 나’란 세계를 현실로 느끼는 자아라고 말합니다. 현실은 그저 존재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서 현실은 타자성입니다. 내가 맘대로 어찌할 수 없는 것, 내가 다 알 수 없는 것, 그래서 저항감을 통해 조금씩 찔러보면서 나아가야만 하는 것, 그래서 나도 어느 정도의 상처를 감수해야만 하며, 그전까지는 두려움과 공포를 감수해야만 하는 것, 그것이 현실입니다. 

만약 SNS를 하는 도중에, 내가 상대에 대해서 어떤 두려움과 공포도 느낄 수 없었고, 그래서 저항감 없이 아무렇게나 악플도 달 수 있었으며, 그래놓고도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아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다면, 그건 ‘진짜 나’가 아닙니다. 현실을 마주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건 저항감이 결여된 ‘가짜 나’입니다. 

‘진짜 나’는 저항감을 가지므로 신뢰감도 가집니다. 하지만 그래서 그는 외롭지는 않습니다. -좋건 싫건-항상 타자가 그의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외로운 자는 저항할 타자도 없는 ‘가짜 나’입니다. ‘가짜 나’는 유아론자입니다. 그야말로 외로운 나르시시스트입니다. 

△과잉의 패러다임과 능력주의를 연결시킨 부분이 눈에 띈다. 과잉사회에서 능력주의가 강조하는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능력주의는 애초부터 공정함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외려 무한경쟁의 불공정성을 정당화하려고 발명된 것이 능력주의입니다.  

과잉의 패러다임은 능력주의를 사랑합니다. 능력주의가 능력을 판정하는 기준을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전능과 무능 외엔 아무런 기준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잉의 패러다임이 능력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경쟁이 공정하기를 바래서가 아니라, 반대로 경쟁이 불공정하다는 것을 은폐하기 위해서입니다. 

일반적으로 과잉의 패러다임 안에선 공정함이란 불가능합니다. 공정함이란 평형을 측정하는 기준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과잉은 경계를 철폐합니다. 그와 함께 공정함도 철폐됩니다. 

오늘날 공정함은 ‘자기연민’과 동일한 의미가 되어버렸습니다. 모가 공정함을 외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사회 전체의 공정함’이 아닌, ‘잘난 사람과 나의 공정함’만을 문제 삼습니다. 그로써 ‘사회가 병들었다’는 공공적 진단보다는 ‘내가 더 억울하다’는 자기주장이 되어버리며, 그래서 ‘사회구조의 변혁’보다는 ‘나에게도 이익을 달라’는 것이 해결책으로 제시되곤 합니다. 이 역시 과잉현상입니다. 과잉은 ‘사회’라는 타자마저 소거하기 때문입니다. 타자감각 없는 공정성은 억울함의 경쟁일 뿐입니다. 

그러니, 만약 진정한 공정함을 원한다면, 애먼 ‘공정함’의 개념을 주물럭거릴 게 아니라, ‘공정함’의 개념을 왜곡하고 날조하고 있는 과잉의 시스템부터 허물어 나가야 합니다. 전 그 구체적 전략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타자감각의 회복이 그 시작점이어야 함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관종의 시대』, 『과잉존재』는 노동, 소비, 휴식, 소통, 관계 등이 폭주하는 시대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다음으로 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작업을 고민하고 있는 화두는 무엇인가.

두 책 모두 ‘육체가 가장 근원적인 타자’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근원적인 전제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지난 세기에 나와 타자 사이에서 벌어지던 전쟁이 오늘날 어떻게 나의 육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가를.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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