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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함석헌53
내가 본 함석헌53
  • 김용준 교수
  • 승인 2005.01.02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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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승리가 아니라 절대승리다
 

<씨알의 소리>지 1980년 1·2월호 합병호 98쪽에 「80년대를 여는 문턱에 서서 본지도 앞으로 새롭고 알찬 씨알의 소리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본지 편집위원을 모셨습니다. <편집위원> 金成植(경희대 명예교수·文博) 安炳茂(한국신학연구소장·神博) 李兌榮(가정법률상담소장·法博) 金東吉(연세대교수·哲博) 宋建鎬(전동아일보편집국장) 金容駿(고려대학교수·理博) 桂勳梯(민주수호국민협의회운영위원) <발행인 및 주간> 咸錫憲 <편집장> 朴善均 월간 씨알의 소리사」라는 社告가 게재되어 있다.

그때까지 그 누구에 지라면 서러워할 만큼 함석헌의 인격에 흠뻑 빠져있던 나로서 새삼 <씨알의 소리>지의 편집위원이 되었다는 사실이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한편 자연과학도로서 정식으로 편집위원이라는 자리에 끼워주신 함선생님의 뜻에 복종한다는 마음으로 겸허히 받아 들였다. 한편 나의 평생에 또하나의 공식적인 명예로운 이력이 아닐 수 없다는 감사한 마음도 있었다. 본래 <씨알의 소리>지에는 특별히 편집위원이라는 것 없이 시작된 함선생님 개인 잡지라는 성격이 짙었다.

최근에 발표된 박선균님의 <70년대 「씨알의 소리」이야기>(<씨알의 소리>지 2004년 7·8월호 27쪽>이라는 제목의 글에 의하면 <씨알의 소리>지 편집위원회가 구성된 것은 1972년 2·3월 합병호가 나올 당시에 장준하 선생님이 함석헌 선생님과 상의하셔서 위촉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박선균님은 <씨알의 소리>지 창간 때부터 편집에 관여한 말하자면 <씨알의 소리>지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그의 회고담은 <씨알의 소리>지 편집에 숨어있는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어떻든 그때 위촉된 편집위원은 폐간된 <씨알의 소리>지를 13개월 동안 무료변론을 담당하여 승소하도록 도와주신 이병린 변호사, 교려대학교 김성식 교수, 동아일보 주필 천관우 선생, 가정볍률 상담소 소장 이태영 변호사, 연세대학교 김동길 박사, 한신대학교 안병무 박사, 민주수호국민회 운영위원 계훈제 선생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1973년 6월에 법정 스님이 편집위원으로 위촉고 훨씬 후에 송건호 선생과 내가 편집위원이 되었다고 소개되어있다. 그러고보면 처음 편집위원 중에서 돌아가신 장준하 선생과 천관우 선생 그리고 이병린 변호사와 법정 스님이 빠지고 송건호 선생과 내가 새로이 위촉된 셈이다. 내 기억으로는 김성식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에 같은 서양사를 전공하신 노명식 교수가 김성식 선생님 후임격으로 편집위원에 가담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1980년도 나의 수첩에 의하면 1980년 1월 28일 점심때 김동길 박사댁에서 <씨알의 소리>지의 편집회의를 했던 것으로 메모되어 있다. 1980년 7월호로 이미 지난 번에 소개한 바와 같이 등록취소가 되었으니 1988년 12월에 두 번 째로 복간될 때까지 7개월간 편집위원회를 가졌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무렵 함선생님은 상당한 기간 당국에 연행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귀가하신 후에 김동길 박사의 주선으로 함선생님을 모시고 수안보 온천에 가서 하룻 밤을 지내고 돌아온 일이 기억에 남아 있다. 1988년 12월 복간호에 <씨알의 소리 복간에 부친다>라는 글에서 나와 같이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었었던 송건호 당시 한겨례 신문사 발행인은 <그 무렵 나는 동아일보사를 물러난 후 독재정권의 감시 밑에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을 때이므로 「씨알의 소리」편집위원이라는 직책은 나에게 있어 외로움을 달래주는 좋은 기회가 되어 있었다. 거의 매일 같이 대문 앞을 기관원이 감시하고 필자가 외출하면 일일이 미행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평소 가까이 지내던 친구도 하나 둘 다 떨어져 나가 거의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으며 지극히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 달에 한 번 당시의 연세대 김동길 교수 집(신촌)에 모여 점심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없는 즐거움이었다. 「씨알의 소리」에 모이는 편집위원들은 당시 박정권에 반대하는 가장 두드러진 지식인 처럼 주목을 받았다>라는 글을 남겼다. 이미 고인이 된 송건호 선생이지만 새삼 이 글에서도 송건호 선생의 체취가 느껴져 감회가 깊어진다. 기왕에 송건호 선생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가지 에피소드를 부연해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인지 딱 기억이 나지 않지만 쌍문동 선생님 댁이라는 것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80년대 초반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선생님 댁에서 한 때를 보내고 있었는데 때마침 선생님께서 송건호 선생의 책을 읽으시다가 <송건호가 예수를 믿으면 참 좋갔다>라고 한마디 하시는 것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느끼는 송건호는 그야말로 쇳소리라도 날만큼 타협이 없는 칼칼한 대쪽같은 인품이었다. 선생님도 그의 책에서 무엇을 느끼셨는지 위와 같은 말씀을 혼잣 소리로 하셨던 것을 보면 선생님도 내가 송건호님에게서 느꼈던 같은 느낌을 가지셨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에 여러분과 같이 예배를 드리게 되서 감사합니다.

내가 지금 이 “순간”이라 함은 그저 보통말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이라고는 안그러겠습니다. 이번 주일에는 그렇게는 말 안하겠습니다.

사람이 몸을 가지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말을 해야 하는 거, 말을 하기 때문에 무슨 소린지도 모르게 하는 때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니까 보통 다른 사람이 하는대로 다 해야지요. 그렇지만 ‘참’산다는 것은 산다는 말도 안붙여도 좋아요. 참이란 것은 지금 여기 뿐이지 또 다른 시간이 있다던지 그런거 아닙니다.

나는 지금 그 자리에서 될수록은 그러려고 힘을 쓰고 있습니다. 다른 시간이라는 것도 빈 생각이다, 또 다른 곳이라는 것도 빈 생각이다. 또 다른 하루가 있다는 것도 그것도 빈 생각이다. 그런 것이 다 건성으로 노는 소리지 ‘참’은 아니기 때문에 ‘참’을 해보려고 될수록은 다른 시간을 상상은 안해봤습니다. 다른 곳이라는 걸 생각도 안해봤습니다. 다른 또 뭣이라는 그런 생각이 일체 안났습니다.

이 말하는 이 순간에도 내 속에서는 그걸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참 싸움을 정말 싸우려면, 참참을 하려면 내가 이 시간에 말도 못할 겁니다. 그렇지만 또 사람이기 때문에 이 순간에 모인 이것을, 몸을 가진 사람으로 예배를 지내야 하니까 내 속에 그런 어느 순간도 순간 뿐이지 그런 순간에 한 것이 그 다음에 무슨 이익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 다음 순간에 할 뭣이 지금 할 것에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 다음 순간에 할 뭣이 지금 할 것에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정말 이 순간만을 살아 보려고, 이 순간에 주어지는 말을 하자고 노력을, 참 의미로 하면 그런 노력도 안해야 되요.

예수님 말씀하신 것 옳은 말씀 아니예요알 “너희가 이제 있다가는 어디로 끌려갈런지도 모르고, 이 세상에서 소위 재판한다, 정치한다는 사람 앞에 가 설지도 모른다, 그럴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대답을 어떻게 할까, 그건 걱정하지마라. 그 순간에 가면 말할 것을 주실거다”

왜알 “말하는 것은 네가 아니요, 네속에 있는 그 분이 하시는 거니까 그 걱정하지 말라”그랬어요.>


위의 글은 1980년 8월 17일 내가 나가는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 절터에 서 있는 봉원교회에서 하신 말하자면 주일 설교의 서두이다. 그날 이 교회 순서지를 보면 <최후의 승리>라는 제목으로 말씀하셨던 것으로 되어있다.

 

나는 그날 하신 선생님의 설교 말씀을 수없이 되풀이 해서 읽었다. 얼마 후에 자세히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어떻든 등록취소되기 약 7개월 전에 정식으로 편집위원이 되었고 그로부터 약 10년 후에 이 잡지를 사실상 책임을 지게 되는 그 과정을 냉철하게 되돌아보면 이미 위에서 인용한 송건호 선생의 글에서 소개된 바와 같이 모든 국민이 절망상태에 빠져 있을 때,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만화와 골계와 같은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그야말로 만화와 같은 세상 돌아감을 직시하시면서 앞으로 10년도 넘기지 못할 당신의 죽음을 미리 예감이라도 하신 듯 마치 유언과 같은 매우 심각한 말씀을 절규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떨리는 마음이 앞서는 숙연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 자리에는 당신을 평소에 추종하는 사람은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그야말로 선생님에게는 낯선 자리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선생님을 그야말로 처음 뵙는 대부분의 사람들 앞에서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까지 몇번 읽어 보세요, 가만히…>라는 말씀으로 끝나는 선생님의 이 설교야말로 십자가의 극형을 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고 끝으로 하나님에게 드리는 마지막 기도문으로 구성되어 있는 그 성경말씀을 되풀이 읽고 <최후승리>가 아니라 <절대승리>로 본래부터 이긴 싸움을 사랑으로 이끌어 나가라는 나에게 주시는 선생님의 유언으로 가슴에 새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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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구 2005-01-17 20:20:57
함석헌선생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가 가장 맘에 와 닿는다.
생각하는 백성들이 많이 필요한 시점이다. 당동벌이라는 2004년말의 한자성어라....서로 의견차이가 있더라도 이해를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조성이 아쉬운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