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03:40 (토)
격동의 현대사와 함께 한 해방둥이 교수들
격동의 현대사와 함께 한 해방둥이 교수들
  • 김조영혜 기자
  • 승인 2004.12.3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굶주림과 가난이 공통분모

올해로 환갑을 맞는 해방둥이들은 여전히 ‘해방의 기쁨을 맞고 태어난 아이’로 기억된다. 게다가 “해방둥이들은 기가 세다”라는 속설은 교수사회에서도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해까지 한국물리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국제물리올림피아드를 주최한 황정남 연세대 교수(물리학과)는 “해방둥이가 특별히 기가 세기보다는 해방기의 혼란과 6.25 등 세파에 시달리다 보니 주변에서 그런 평가를 듣곤 한다”라고 말했다. 김영기 경상대 교수(정치행정학부)는 “해방둥이들이 편모 슬하에서 자란 경우가 많은데, 한국전쟁의 영향이 클 것”이라며 “어려운 시기를 견디다 보니, 자생력이 강해졌다”라고 말했다. 덧붙여 김 교수는 “우리 세대는 자라면서 사회의 혜택을 받고 자라지는 못했지만, ‘광복의 기쁨과 함께 태어난 해방둥이’라는 자기 최면 속에서 해방의 의미를 새기며 자랐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해방둥이들이 그렇겠지만, 해방둥이 교수들을 엮어주는 공통분모는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도 학문을 계속해 왔다는 것. 해방둥이는 ‘굶주림을 아는 마지막 세대이고, 풍요로움을 맛본 첫 세대’라는 말마따나 해방둥이 교수들은 해방 이후 60년간의 경제적 성장을 몸소 체험했다.  

 

‘옥수수 박사’로 유명한 김순권 교수(경북대 농학과)도 해방둥이다. 김 교수는 “피난통에 길에서 얻어먹었던 주먹밥 하나가 옥수수를 연구하게 된 계기”라고 말했다. “어떻게든 굶주리지 않고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옥수수 육종 개발에 몸담게 됐다는 것. 그만큼 해방둥이들에게 가난과 굶주림은 뼈에 박힌 恨이다. 김영기 교수는 “학교 다니면서 공납금 한 번 제 때 내는 게 소원”이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한국전쟁에서 아버님이 전사하고 가세가 기울어 고학한 경우다.  

 

해방둥이들은 대학생 시절, 6・3 한일수교협상에 반대하며 전국규모의 집회를 벌이는 등 일본에 대한 감정이 유독 민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린 시절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귀로 체험한 반일 정서 때문이다. 한 교수는 미국 유학 시절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줬다. 미국인 지도교수 밑에 일본인 박사과정생과 둘이 공부를 하게 됐는데,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일본에 징용가서 매맞았던 얘기가 귀에 박혀서 일본 학생에게는 절대 지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공부에 매진했다는 것. 결국 그는 일본학생을 앞지르고 3년 만에 석・박사를 취득했다고 한다.  

 

해방둥이가 살아온 육십 평생은 한국의 근현대사와도 맞먹는다. 해방둥이들은 다섯 살에 한국전쟁을 겪고 중학교 3학년 때 4.19 혁명을,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5.16을 겪었다.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몸소 체험한 세대다. 게다가 대학생 때는 6・3 한일수교협상에 반대하는 집회를 벌이는, 민주화 1세대이기도 했다. 해방둥이 교수들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이어온 주축인 셈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