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20:40 (목)
[학술대회] ‘인문학의 위기와 교육정책의 구조적 전환’
[학술대회] ‘인문학의 위기와 교육정책의 구조적 전환’
  • 홍기돈 객원기자
  • 승인 2001.05.1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동철학회·한국비교철학회 2001 국제철학대회
살아있는 사람이 죽었을 때 필요한 것이 사망진단서다. 이미 죽어 땅에 묻힌 지 오래된 사람에게는 사망진단서가 필요없다. ‘위기’를 둘러싼 논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떤 상황이 위기라면 그 이전에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런 전제를 설정하지 못하는 위기상황의 강조는 자칫하면 호들갑이란 혐의를 받기 십상이다. 일반적 상황을 특수화시키는 것은 주체의 과장된 위기감에서 파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을 인문학의 상황에 도입해 보는 것은 어떨까. 90년대 중반부터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강조가 끊이질 않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물음이 가능하다. 근대에 진입한 이후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이 호황을 맞았던 적이 과연 존재하는가. 이전에 비해 주체적 관점에서 기술된 인문학 연구서들의 발표가 늘고 있는데도, 정말 ‘인문학의 위기’라는 진단이 타당한 것일까. 어쩌면 대학 제도 속에서 그나마 안정적으로 확보되던 인문학자의 영역이 줄어든 데 따른 위기의식을 그렇게 표출하는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인문학의 위기’란 ‘인문학자의 위기’에 불과할 따름이다. 인문학의 위기란 만성 상태였으니 새로울 것 없고, 오로지 신자유주의의 영향에 따라 인문학자의 존립 터전이 흔들거리는 상황만이 새로워졌으니 말이다.

“문학연구로 활로 찾기는 허위의식”

지난 5월 11일, 12일 전남 성륜사에서 大同哲學會·韓國東西哲學會 공동주최의 학술대회가 열렸다. ‘2001 국제철학대회-인문학의 위기와 교육정책의 구조적 전환’. 이번 학술대회가 관심을 끄는 것은 ‘인문학의 위기’와 ‘교육정책의 구조적 전환’을 한데 묶고 있다는 점이다. 기실 교육정책을 바꾼다고 인문학의 위기가 해소될 리는 만무하다. 교육제도를 아무리 바꿔봐야 교육이 바로 서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인문학에 대한 관점을 올바로 확립하는 일이며, 교육관을 근본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자의 위기’가 ‘인문학의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따라서 ‘인문학자의 위기’와 ‘인문학의 위기’ 사이에서 어떠한 균형감각을 확보할 수 있는가에 관심이 쏠리게 된다.
연이틀 진행된 학술대회답게 많은 연구자들이 발표자로 나섰다. 한숭동 대덕대 학장, 박선자 경상대 교수, 사토시 우카이 히토츠바시대 교수, 핸리후드 스타니 슬라스고 교장, 이지애 이화여대 교수, 정세근 충북대 교수, 일리아 T. 카사빈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교수, 李晶 요녕대 교수, J. E. 포울커서 브라이엄 영대 교수, 김득룡 한남대 교수, 최우원 부산대 교수, 임재진 조선대 교수, 박덕규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원. 대회의 주제와 관련하여 흥미를 끄는 것은 임재진 교수, 박덕규 연구원의 발표이다.
임재진 교수의 발표문은 ‘인문학 위기 담론의 기본구조와 인문학공동체’. 임교수는 이 논문에서 인문학의 개념 규정, 인문학을 둘러싼 조건, 제도의 측면을 살펴보고 있다. 철학사를 훑어 내린 끝에 임교수가 규정하는 인문학의 개념은 이러하다. “위기담론에 유의미하게 부응할 수 있는 인문학 규정을 필자는 문화시대와 비판적·규범적 접근의 결합에서 구할 수 있다고 본다. 즉 인문학을 ‘인간다운 문화의 향유와 창조를 위한 모색’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는 표현인문학적 규정과 비판적 인문학의 결합인 셈이다.”
이러한 규정은 다분히 현실 조건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즉,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정체성과 새로운 방식의 결합을 통해 인문학의 존재이유”를 드러내겠다는 야심이 전제되었다는 것이다. 자, 모색을 가장한 비판적 물음을 보라.
“문화연구가 기술문명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종래의 인문학과 자연과학, 공학의 구별이 무의미해졌다면, 인문학이 문화연구로 나아가는 것은 충분히 용인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인문학의 정체성 내지 접근방법 등의 변화를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문화연구는 허위의식일 수도 있는 대중의 욕망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대중의 거친 욕망과 그것의 수요를 인정하고 모든 학문에 기술의 침투를 용납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인문학의 정체성을 새롭게 모색해야 한다. 반대로 여전히 인문학의 전통적 정체성을 고수하려 한다면 시대의 통속적 흐름에 저항하는 것을 인문학의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 과연 양자택일의 관계인가 아니면 제삼의 길이 있는가.”
아쉬운 점은 임교수의 논문은 그러한 호기로운 물음 뒤에 놓인 길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욕망, 문화와 연관한 인문학의 가능성이라면 이미 최봉영 항공대 교수가 ‘주체와 욕망’(사계절刊)을 통해 접근한 바 있다. 그렇다면 임교수는 인문학이 내재하게 마련인 대중의 욕망·문화에 대한 긴장을 나름의 방식으로 밀고 나가는 양상을 보여줘야 했던 것이 아닐까. 또한, 물음 뒤의 세계가 존재하기 않았기 때문에 제도의 측면에서는 당위의 차원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점도 아프게 다가온다.

‘생존전략’, 인문학의 생존과 무관

박덕규 연구원의 ‘한국 인문학의 위기극복과 생존전략’에는 한국 인문학의 어려운 상황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다른 나라, 다른 분야와의 상황 비교가 수치를 통해 객관적으로 제시되어 있으며, 선진국의 사례가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그런데, ‘생존전략’의 모색에서 보자면 그게 과연 인문학의 정신을 담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가는 의문이다. 예컨대 “행정관료들이 인문학적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 등 국가고시에서 단순 내용들을 암기한 것으로도 합격할 수 있는 한국적 상황”을 문제 삼으며 “이러한 국가고시에 인문학을 필수과목으로 넣는 것이 필요함“이라는 주장을 보자. 시간을 견디며 과정 속에서 깊어지는 인문학 정신이 결과 중심의 시험을 통해 과연 마련될 수 있을까. 인문학 정책 수립의 어려움을 새삼 느끼게 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기실 인문학의 위기를 둘러싼 논의는 때늦은 감이 있다. 물론 인문학의 성격상 유행에 따라 부침을 거듭할 주제는 분명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 성격으로 인해 때늦은 인문학 논의에는 일말의 기대감이 따른다.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이들은 어떤 고민을 어느 정도의 성숙한 깊이로 드러내고 있는가. 이를 충족하기에 다소 아쉬움이 남는 학술대회였다.
홍기돈 객원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