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8:10 (금)
잊지 못할 80년 5월 트라우마…토론문화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역사와 토론’ 
잊지 못할 80년 5월 트라우마…토론문화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역사와 토론’ 
  • 강치원
  • 승인 2021.06.15 09: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치원의 ‘원탁토론 운동 30년, 내가 얻은 교훈 그리고 미래 교육’①

강치원의 ‘원탁토론 운동 30년, 내가 얻은 교훈 그리고 미래 교육’ 연재를 시작합니다. 강원대 사학과에서 정년을 마친 강치원 교수는 현재 호서대 벤처대학원 특임교수와 원탁토론아카데미 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강 교수는 전공 못지않게 토론문화 운동에 열정을 쏟아 왔습니다. 그가 토론문화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사연과 30년 동안의 원탁토론 운동의 경험, 그리고 그 30년 경험을 바탕으로 내다보는 교육의 미래를 6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매주 화요일 오전에 독자 여러분을 찾아 갑니다.  
 

 

강치원 호서대 특임교수 / 원탁토론아카데미 원장

대학전임으로 35년간 근무하고 강원대에서 정년퇴임한 지 만 3년이 되어간다. 시간강사 기간 1년을 포함하면 만 39년 가까이 대학 강단에 서고 있는 셈이다. 요즘 공적으로 하는 일은 호서대 벤처대학원 특임교수, 한국사학진흥재단 비상근이사, 교회 장로, 원탁토론아카데미 원장 등이다. 개인적으로는 원탁토론 Zoom(화상회의 플랫폼) 화상강의 강사를 섭외하는 일, 성경이나 책을 읽는 가운데 중요 구절을 카드로 만드는 일 등을 하고 있다. 

나의 전공은 서양 중세사로 유럽의 정치, 교육, 복지 등에 관심을 갖고 있다. 돌이켜보면 전공 못지않게 열정을 쏟았던 일은 토론문화 운동이었다. 내가 토론문화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역사와 토론’이라는 문제의식에서다.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선배들에게는 역사를 토론하는 것이 바로 실천이었다.  E. H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대화”라고 했다. 나는 “토론이란 사실과 가치와 의지의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토론이론은 역사이론을 바탕으로 한다. 

나에게는 1980년 5월 트라우마가 있다. 대학원 재학 중 ‘고려대 대학원생 시국선언문’의 기초와 작성에 참여하고 대학원 시위를 주도했다. 우리나라 학생 운동사에서 그때까지는 대학원 학생회가 없었다. 1980년 처음으로 서울대와 고려대 대학원 시국성명이 발표되었다. 신군부 타도와 민주화를 부르짖는 내용이다. 나중에 들었지만 지도교수가 일본에서 TV를 통해 내가 선언문을 낭독하고 연설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군경합동수사본부에서 나왔다는 수사관들이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쳐 내 책상 서랍에서 몇 가지를 챙겼고 형수와 조카들, 동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수갑을 채웠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서울 성북경찰서와 중앙정보부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극도의 고통, 고문을 당했다. 

지금이야 5·18 광주민주화운동이지만 당시는 ‘광주 사태’라고 불렸다. 광주와는 모든 것이 막혀 있었고, 전화 통화도 연결되지 않았다. 쉬쉬하는 흉흉한 소문만 돌았다. 다짜고짜 삐라(전단지)를 어떻게 만들었으며, 어디에 뿌렸는지 밝히라는 것이다. 동교동 자택에서 선생께서 어깨를 두들기며 돈 봉투를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대학원 조직은 자네만 믿네.” 선생을 만난 적도 없는데 졸지에 내란음모를 위한 대학원 조직책이 되어 버렸다. 

그들의 대화에서 “전라도 놈의 새끼들 싹…”이라는 표현도 들려 왔다. 모멸감과 자괴감, 공포 속에서 수사관이 불러주는 대로 조서를 달달 외우는 수밖에 없었다. 고통과 공포 상태에서의 수사는 행적 진술에서 내가 직접 행동으로 옮긴 것인지, 순간적으로 생각만 한 것인지, 남에게 들은 것인지 도대체 구분이 안 되게끔 만들어 버렸다. 수차례에 걸친 진술서 작성은 10·26 이후 오래 전의 일조차도 정확히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까지 기억(?)하게 만들었다. 

창문을 통해 시원스레 보이는 남산 타워가 예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 여기가 중앙정보부이구나!” 한때 검정 세단 승용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기만 해도, 검정색 선글라스를 쓴 사람만 보아도, 따르릉 전화 벨소리가 울리기만 해도 나는 한참 동안이나 공포와 공황에 질리곤 했다. 전라남도 영광이 고향이다. 부모님 댁에 내려가면 늙으신 어머님께서는 허리를 못 쓰는 아들, 마흔 다섯에 나으신 막둥이에게 이것저것 단방약을 내오셨다. 정말 별의별 것을 다 먹어 보았다.(계속)

강치원 호서대 특임교수 / 원탁토론아카데미 원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