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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48] “민주주의자는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불복종하는 사람이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48] “민주주의자는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불복종하는 사람이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06.14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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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셀머 벨레게리거

 

 

김은석이 쓴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개인적 아나키즘에 대해 “원자론적 사회관에 기초하여 완전히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개인의 주권을 강조”하고 “적극적인 사회활동과 집단행동에 부정적”이고 “토론을 통한 개인의 완성이나 계몽활동에 의한 점진적인 무정부사회의 실현을 지향한다”(37쪽)라고 하며 고드윈, 슈티르너, 터커를 그 대표자로 소개한다. 그러나 개인적 아나키스트가 혁명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프랑스의 안셀머 벨레게리거(Anselme Bellegarrigue, 1813~1869)가 그렇다. 장 프레포지에의 『아나키즘의 역사』에는 그 이름조차 나오지 않지만, 조지 우드코크가 쓴 『아나키즘』에는 프랑스 아나키스트 항목에 그가 맨 처음으로 나온다.

벨레게리거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1846년부터 2년간 미국을 방문하여 뉴욕과 보스턴 그리고 뉴올리언스에서 살면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조슈아 워렌의 사상에 접하고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신봉하게 되었다. 1848년 혁명 직전에 프랑스로 돌아와 혁명에 참여했으나 그 방향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혁명 현장에서 어느 노동자가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는다”고 하자 벨레게리거는 “벌써 실패했다. 이미 당신들은 정부를 임명하지 않았는가?”라고 답했다. 혁명은 정부의 수립이 아니라 모든 정부의 파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개입은 노예화나 폭력적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해 모든 권위주의적 조치와 사회적 조치에 반대한 것이었다.

 

안셀머 벨레게리거(Anselme Bellegarrigue, 1813~1869)
안셀머 벨레게리거(Anselme Bellegarrigue, 1813~1869)

 

그런 생각을 공유하는 사회사상가들과 함께 블랑키 클럽(Club Blanqui, Société Républicaine Centrale)에 참가하여 제2공화국의 모든 정당들을 비판했다. 그래서 “아나키는 질서이고 통치는 내전”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시민 불복종과 자발적 복종에 대해 “민주주의자는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불복종하는 사람이다. 지금도 폭군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틀렸다. 노예가 있을 뿐이다. 아무도 복종하지 않고 아무도 명령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존재한다, 그 외 모든 것은 미지수다

 

1848년 말에 그는 툴루즈에서 「행동! 행동! 민주주의 사상 안내」라는 아나키즘 팸플릿을 발간하면서 그 첫 쪽에 “인민은 언제나 과도하게 지배되고 있다”고 썼다. 1849년에는 툴루즈의 신문 <문명(La Civilization)>의 편집인으로 공화국을 비판하는 글을 썼고, 1850년에는 어린 시절의 친구들과 함께 파리 근교에서 진보사상가연합(Association des Libres Penseurs)을 설립했으나 회원의 체포로 곧 해산했다.

그 뒤 파리로 돌아와 1850년에 <아나키, 질서의 잡지(Anarchie, Journal de l' Ordre)>를 창간했다. 편집과 경영 및 집필을 겸한 1인 잡지는 자금 부족으로 2호 발간에 그쳤으나, 이는 아나키즘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최초의 정기간행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1852년 『아나키 연감(Almanach de l' Anarchisme)』의 발행을 시도했으나 발간되지는 못했다. 1851년에는 몇 편의 소설과 미국 기행문 등을 썼으나, 프랑스에 제2 제국이 세워지면서 남아메리카로 망명해 언제 어디에서 죽은 지도 모르게 사라졌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어린 시절과 함께 마지막 시절에 대해서도 모른다.

우드코크가 말하듯이 벨레게리거는 슈티르너를 방불하게 하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였지만 그가 슈티르너 저서를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반면 당시 프랑스에서 유명했던 프루동을 벨레게리거가 읽을 수는 있었고 그를 존경하기도 했으며 그와 유사한 생각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프루동을 썩 좋아하지는 않은 듯하다. 프루동이 “오랜 관습으로부터 발을 내디뎌 일반의 이익에 약간의 광명을 주었다”고 인정하는 정도였다. 프루동보다 슈티르너에 가까운 유아론적 에고이스트인 그의 사상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나는 모든 것을 부인한다. 나는 나 자신만을 긍정한다. 나는 존재한다, 그것만이 확실하다. 다른 모든 것은 추상적이고 수학에서 말하는 x, 즉 미지수이다. 나 자신의 이익보다 우월한 이익은 있을 수 없고, 내가 자신의 이익에 대해 희생시킬 의무가 있는 이익은 있을 수 없다.”

나아가 그는 사회는 필연적이고 자연적인 것이므로 “모든 파괴와 모든 혼란에 저항하는 본원적인 것”이라고 보고 “기본적인 유기체”라고 인정한 코뮌에서 사회를 발견하고 지배자가 사회에 간섭하지 않으면 그 구성원인 개인의 이익이 조화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섭리에 의한 조화의 법칙”을 지키는 것은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이고, 따라서 정부와 군대와 관료는 물론 법이나 정당도 없어져야 마땅하다고 보았다. “정의의 유일한 힘, 관성의 힘, 협동의 거부”를 뜻하는 불복종에 의해 인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그는 믿었다.

 

레닌 이전의 레닌주의자

 

우드코크는 벨레게리거에 이어 폭력적 아나키스트 혁명가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에르네스트 쿠드로이(Ernest Cœurderoy, 1825~1862)와 데자크(Joseph Déjacque, 1821~1864)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레닌 이전의 레닌주의자’라고도 하는 쿠드로이는 의사로서 폭력적 아나키스트가 되어 대부분의 세월을 망명지에서 보내다가 빈곤으로 자살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자신이 참여한 1848년 혁명이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 때문에 실패했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비난했다. 샤를 푸리에, 피에르 르루, 프루동의 영향을 받아 "집단주의와 아나키즘적 상호주의의 통합"인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그는 생산 수단의 공동 소유권, 모든 사람이 작업 도구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 개인 재산 및 노동 제품의 상호 교환을 요구했다. 그를 니체와 견줄 수 있는 있는 뛰어난 작가라고 평가하는 아나키스트도 있지만 전쟁을 갱생의 기회로 찬양하는 그의 폭력주의적인 전투적 사회 철학이 오늘날에도 호소력을 갖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치적 수단은 무익하고 인민의 해방은 인민 자신의 임무이며 어떤 권력이나 부정도 사회악에 반대하는 통일된 인간성에는 대항하지 못한다는 그의 주장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에르네스트 쿠드로이(Ernest Cœurderoy, 1825~1862)
에르네스트 쿠드로이(Ernest Cœurderoy, 1825~1862)

 

한편 데자크는 더욱 폭력적인 노선으로 나아갔다. 그는 프랑스어로 아나키스트를 뜻하는 리버테러(libertaire)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고 프루동의 성차별주의를 비판하고 여성의 권리를 지지했으며, 프루동이 신성시한 아나키 사회의 성스러운 핵심으로 본 가족을 공격했고, 프루동이 부도덕하여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본 것들을 혁명을 위하여 옹호했다. 26세인 1847년에 폭력으로 모든 권위를 파괴할 것을 촉구하는 시를 썼고 1848년 혁명에 참가했다가 구속되었고, 1851년에 시집 발간을 이유로 2년 형을 받았으나 런던으로 탈출한 뒤 뉴욕 등에서 계속 망명 생활을 했다.

 

데자크(Joseph Déjacque, 1821~1864)
데자크(Joseph Déjacque, 1821~1864)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와 비참한 생활조건을 폭력적으로 비난하며 사회 혁명을 촉구한 그는 1855년에 프랑스 사회주의자, 독일 공산주의자, 영국의 차티스트를 한데 모아 국제노동자협회의 전신인 국제 협회의 창립 선언문에 서명했다. 1858년 6월 9일부터 1861년 2월 4일까지 27호를 발간한 <르 리베테어(Le Libertaire)>는 미국 최초의 아나코-공산주의 저널이었다. 노예해방운동가 존 브라운(John Brown)의 교수형을 비판하고 노예폐지론을 주장한 그는 극심한 빈곤 속에서 죽었다. 데자크는 낡은 사회를 파괴하는 수단으로써 음모와 비밀행동을 긍정하고 종교와 재산, 가족과 국가를 폐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 종교, 재산, 가족, 모두가 연결되어 있고 모두 일치한다"고 생각한 그는 사회 혁명의 내용은 가족에 기초한 모든 정부, 모든 종교, 가족, 부모와 남편의 권위, 상속을 폐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최초의 아나코-공산주의 저널 '르 리베테어(Le Libertaire)'
1858면 6월부터 미국 뉴욕에서 발행된 아나키스트 신문, '르 리베테어(Le Libertaire)'. 위 지면은 1909년 10월 31일자 신문.

 

코뮌이 몰락하면서 아나키즘도 추방되다

 

데자크는 19세기 아나키스트로서는 보기 드물게 유토피아를 그리기도 했다. 대도시가 사라지고 백만 명을 수용하는 시클리데온(cyclideons)이라는 거대한 기념집회당이 대신 세워진다는 점에서 황당무계한 그의 유토피아는 푸리에의 팔랑주를 연상하게 하는 소규모 사회를 단위로 한다. 그곳의 노동은 푸리에가 말한 매력의 원리에 의해 조직되어 구성원이 원하면 언제나 주거나 일을 바꿀 수 있고, 가족은 폐지되며 연애가 자유롭게 인정되고 어린이들은 따로 기숙하며 모성애나 부성애가 특히 발달된 사람들에 의해 양육된다. 그가 구상한 유토피아의 자치주의는 뒤에 크로포트킨이 『빵의 쟁취』에서 주장한 미래사회의 선구가 되었다.

이상과 같은 다양한 아나키즘이 19세기 전반에 등장했지만 1860년대에 아나키즘이 사회적 중요성을 더 크게 갖게 되면서 중심이 된 것은 역시 프루동의 아나키즘이었다. 그 운동의 중요한 거점은 1865년 파리에 설치된 인터내셔널 파리 사무국이었고, 그 회원들은 1871년의 파리코뮌에서 중심이 되었다. 4월 19일의 프랑스인민선언의 다음 구절은 코뮌이 아나키즘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코뮌의 절대적 자치는 프랑스의 모든 곳에서 각자의 완전한 권리를 모든 프랑스인에게 인간으로서의, 시민으로서의, 노동자로서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것을 보장한다. 코뮌의 자치는 그 계약을 지키는 다른 모든 공동체의 평등한 자치라는 제한 외에 아무것도 없다. 코뮌들의 연합은 프랑스의 자유를 보증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코뮌은 실패하고 모든 사회주의 활동을 금지하는 1872년 3월의 특별법으로 인해 아나키즘은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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