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8:55 (금)
"차 마시는 일은 近思의 실천"
"차 마시는 일은 近思의 실천"
  • 강판권 계명대
  • 승인 2004.12.2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생각하는 이야기_ 茶道와 나무

▲강판권/계명대·동양사 ©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존재는 희망을 잃은 자이다. 희망은 꿈을 꾸는 자의 몫이다. 꿈을 꾸는 자는 나무처럼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 수 있다. 스스로 에너지만 만들 수 있다면 인간은 행복할 수 있다. 그래서 나도 행복하기 위해서 매일 꿈을 꾼다. 꿈은 미래의 일이지만 언제나 현실의 영양분을 먹고 자란다. 그러니 꿈은 미래가 아니라 현실이다. 나무처럼 현실에 충실할 때, 가장 현실적일 때 꿈을 이룰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꿈을 이루기 위해 나무처럼 자강불식하려 한다. 지식인은 매너리즘에 빠질 때 가장 위태롭다. 지식인의 매너리즘은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지 못할 때 찾아온다. 지식인이 이곳에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하면 외부에서 변화를 요구한다. 지식인이 이 상태에 빠지면 ‘암’에 걸린 것과 같다.

나도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지 모른다. 그러나 항상 빠지지 않기 위해 고민하고 해결방법을 찾는다. 내가 찾은 방법 중 하나는 낙엽수처럼 해마다 새로운 잎을 만드는 것이다. 지식인에게 새로운 잎과 같은 것은 작품이다. 그러나 자신을 제외한 몇 사람의 독자만을 확보할 수밖에 없는 전공 논문은 희망을 낳기보다는 절망을 잉태한다. 신나게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익숙한 것에서 낯선 곳으로 도전하는 일이다. 낯선 일에 도전하는 일만큼 두려운 것도 없지만, 그보다 신나는 일도 드물다.

나는 요즘 차 관련 책을 쓰고 있다. 나무로 역사를 쓰는 작업의 일환이지만 다른 것도 아닌 차를 선택한 것은 무엇보다도 차가 일상의 음료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곳에서 생각하면 그곳에 仁이 있다는 공자의 말처럼, 차 공부는 近思의 실천이다. 내가 매일 마시는, 중국은 물론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마시는 차의 역사를 쓴다는 것은 일상과 학문을 묶는 작업이다. 그러나 斷代史가 아닌 通史를 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지만, 나는 모르는 게 많아서, 공부할 게 많아서, 궁금한 게 많아서 즐겁다. 차나무를 보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전라도 보성과 지리산으로 가는 여행도 행복한 공부이다. 겨울 즈음 피는 차나무 꽃과 열매를 보기 위해 1년 동안 기다리는 일도 애틋한 사랑이다. 큰 공부는 기다림이 발효한 그리움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중국차의 역사는 곧 중국의 역사이다. 중국차를 통해 귀족과 사대부와 신사 등 중국의 지배층을 만날 수 있다. 중국차를 통해 불교와 성리학 등 중국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차를 통해 중국과 유목민의 관계를 읽을 수 있다. 중국차를 통해 중국과 서양간의 마찰을 엿볼 수 있다. 차의 제조법을 통해 아편전쟁의 단서를 포착할 수 있다. 차는 정신을 맑게 한다. 나는 차를 통해 역사를 보는 눈을 닦는다.

차를 마시는 행위는 禪이자 道이다. 나는 차를 마시면서 반성한다. 중국의 차는 차를 국가에 바쳤던 중국인들의 고통과 눈물의 산물이다. 나는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역사의 눈물도 함께 마신다. 새벽녘 허름한 옷을 입고 중국 역대 황제의 차 밭이었던 복건성 북원으로 가는 노동자들의 뒷모습이 찻잔에 어른거린다. 나는 차의 경전인 陸羽의 茶經을 차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치면서 희망의 싹을 발견했다. 그들과 학교 본관 앞에 자라고 있는 한 그루의 차나무를 보면서 이 세상에서 아주 위대한 차를 숭배하기로 작정했다. 숭배의 대상은 언제나, 공부의 대상은 늘 한 잔의 차처럼 내 곁에 있는 법이다. 일상이 희망이자 꿈이다. 그래서 차는 꿈이고 희망이다. 아니 역사와 인문학도 희망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