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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일본의 내셔널리즘,무엇을 조장했나
근대일본의 내셔널리즘,무엇을 조장했나
  • 교수신문
  • 승인 2001.05.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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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18 14:30:20
『일본의 천황제』(이산 刊), 『야스쿠니 신사』(소화 刊)
『일본 공산주의 운동과 천황제』(국학자료원 刊)

미국이 유엔 인권위원회 위원국, 국제마약통제위원회 이사국의 지위를 잃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다. 세계를 쥐락펴락 하겠다는 부시 정권의 방약무인이 국제 사회에서 냉대 받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무리 초강대국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의 입장에서라면, 이러한 상황 위에 일본의 교과서 왜곡 문제를 겹쳐 볼 수 있다. 유아독존 격인 일본의 뻔뻔한 자세는 미국이 보여주는 오만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미국은 크게 다르다. 부시 정부의 정책적 판단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미국의 경우라면,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 사회의 특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사상’에서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가 얘기하고 있는 개국(開國)의 이중성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개국이라는 의미는 자신의 바깥, 즉 국제사회에 여는(開) 동시에 국제사회에 대해서 자신을 국가(國)=통일국가로 선을 긋는다(劃)는 의미의 양면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 양면의 과제에 직면한 것이 아시아의 ‘後進’ 지역에 공통된 운명이었다.”

에는 천황 영향력 미약

스즈키 미사유키(鈴木正幸)의 ‘근대일본의 천황제’ (류교열 譯), 오에 시누보(大江志乃夫)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양혜현·이규태 譯)는 일본의 천황제를 문제삼고 있다. 천황제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근대적 국가로서의 일본, 그러니까 현재 일본의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景氣가 나빠졌을 때 일본에서는, 교과서 왜곡 문제와 같은, 우익적 발언이나 행태가 횡행하게 되는가.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천황제를 통해 구획된 근대적 일본의 사상을 이해해야 한다.

‘근대일본의 천황제’는 “외재적인 개념인 절대군주나 제국주의로부터 연역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천황제 자체에 내재하는 논리 속으로 파고들어” 그 정착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격변기 이전에 일본 천황의 영향력이란 미미할 따름이었다. 대부분의 민중들이 장군이나 다이묘(大名: 영주)의 존재는 알아도 천황의 존재는 모를 지경이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의 정치인들은 민중에게 권위를 갖는 대상과 천황의 종교적 지위를 연결시키는 작업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의 장점은 정치적 상황의 격변 속에서 강화되어갔던 일본 내셔널리즘의 성격을 유동적으로 생동감 있게 따라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근대적 군주로서의 새로운 천황상’을 창출하기 위해 1876년 시작된 천황의 지방 巡行, 천황의 초상 문제 따위는 마루야마 마사오가 얘기하고 있는 ‘구획된 국가’의 흐름을 제대로 보여준다. 그러한 의도적인 창출이 급변하는 정세와 무관하게 이뤄질 리 없다. 전쟁을 수행하는 그 팽팽한 긴장 위에서 막부 말기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까지의 천황제를 살피는 것이 ‘근대일본의 천황제’이다.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하는 일본의 국가적 성격, 일본민족의 우월성”에 관해 기억해 둘만한 대목 하나. “청일전쟁의 승리는 아시아의 ‘야만’에 대한 문명국 일본의 승리라고 선전되었으며, 국민들도 그렇게 의식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청일전쟁은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우월감을 국민적인 규모로 성립시킨 분수령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시아에 대한 우월성의 근거는 일본이 보다 문명적이라고 하는 점에서 구해졌으므로, 역으로 말한다면 일본보다 훨씬 고도의 문명국이라 생각되었던 서구에 대해서는 그만큼의 열등감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시아에 대한 우월감과 서구에 대한 열등감의 사이. 그 사이에서 浮沈하는 일본인의 의식은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 경기가 나쁠 때처럼 위기감이 팽배할 때 그러한 의식이 표면에 드러난다. 우익적 발언과 행동이 불거지는 것이다. ‘야스쿠니신사’는 아직까지도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는 그러한 의식을 밝혀내고 있다. 전전(戰前) 일본의 파시즘이 현재 변형되어 잔존하는 상황, 학계의 유행어로 치면 ‘일상적 파시즘’을 문제삼는 것이다. ‘근대일본의 천황제’가 정치사적 흐름을 갖는다면, ‘야스쿠니신사’는 의식사적 흐름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전쟁이 끝날 즈음 일본에 대한 미국의 최대 고민은 천황의 처리 문제였다. “일본인에게 천황이란 지금 살아가는 근거이자 동시에 최악의 경우에는 신명을 던지는 근거”이기도 한데, 천황제를 폐지한다면 패전국 일본의 복수심을 키워 오히려 의식적인 차원에서 천황의 존재 비중은 커지게 마련이다. 결국 군부와 천황 사이에 만들어진 긴밀한 관계를 끊는 차원에서 미국은 수순을 밟아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바람직하게 이뤄졌는가.

인 신앙의 접착제로 기능

그러한 물음에 대해 오에 시노부는 ‘야스쿠니신사’를 둘러싼 태도를 리트머스 시험지로 들이대고 있다. “패전까지의 일본 국민을 ‘천황의 군대’에 밀접하게 결부시키는 고리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야스쿠니신사이기 때문이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 살았던 일본 국민이 국가에 의해 신으로 모셔지는 유일한 기회가 야스쿠니 신사의 신이 되는 길이었다. 야스쿠니신사의 신이 되기 위한 단 하나의 조건은 천황 폐하를 위해 전사하는 길이었다.” 그러니 정치인의 야스쿠니신사 공식참배는 “전쟁 전의 국가신도의 부활을 꾀한다고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이 책에서도 기억해 둘만한 내용 하나. “민중의 황대신궁에 대한 신앙은 ‘천자’의 선조, 즉 황조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신 신궁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농업신으로의 신궁에 대한 신앙이었다.” 이질적인 신앙을 하나로 묶은 것이 근대일본의 체제였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 내셔널리즘이 기승을 부릴 수 있는 바탕은 이처럼 종교적 측면과 결부되었기 때문이다.

외래 사상이 천황제의 맹위 앞에서 어떻게 허물어지는가를 살펴보자면 정혜선 숙명여대 강사의 ‘일본공산주의운동과 천황제’가 유용하겠다. 특히 이 책의 5장 ‘공산주의 운동의 와해와 천황제’는 일본 공산주의 운동에 목숨까지 걸었던 이론가 사노 마나부(佐野學)가 천황제에 깊이 빠져들게 되는 과정에 흥미있게 접근하고 있다. 홍기돈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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