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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간직한 글쓰기...고백은 날카롭다
흔적을 간직한 글쓰기...고백은 날카롭다
  • 최익현 문화평론가
  • 승인 2004.1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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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산문집의 세계

독백으로서의 산문을 읽어나갈 때, 우리는 이 독백/고백하는 화자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한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밀그램이 증명했듯, 우리는 ‘좁은 세상’을 살고 있다. 산문은 한 개인이 그의 시대, 좁은 세상과 어떻게 관계맺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빼어난 글쓰기 장치이기도 하다. 설령 자기 자신을 원질로 삼아 글쓰기를 지속한다고 해도, 그의 살과 뼈와 욕망과 정념을 형성시킨 ‘흔적’들을 은폐할 수 없다. 여기에 산문 읽기의 또 다른 매력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소년의 눈물’(서경식, 돌베개, 2004.9), ‘나는 상식이 불편하다’(김보일, 소나무, 2004.10), 그리고 ‘고유명사들의 공동체’(김정환, 삼인, 2004.11)는 공교롭게도 공통점이 많으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산문집’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성장의 편력을, 그들이 지나온 세월의 두께가 정직하게 묻어나는 글들이다.

어른은 누구나 소년기를 거쳐 출현한다. 거기에는 소년의 정신에 세워진 푯대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게 마련이고, 그것은 공중에서 깃발처럼 펄럭이며 긴 그림자를 늘인다. 아무도 소년기를 감출 수 없다. 이 세권의 산문집에는 소년의 정신을 에워싼 푯대가 바람에 펄럭거리는 풍경이 밑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은 디아스포라의 무늬가 깊게 새겨져 있는, 이중 국어로 살아가야 했던 재일조선인의 자기 고백이다. 그의 주변에는 다자이 오사무를 비롯, 니콜라이 바이코프, 토마스 만, 루쉰, 김소운 등이 마주 서 있다. 저자는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없는 자기 연찬으로서의 독서, 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 그 같은 절실함이 내게는 결여되어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의 산문 곳곳에 묻어나오는 체취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가 분명하다. 그가 ‘결여’를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마땅히 더 간절하게 충족돼야 할 필요충분조건으로서의 ‘부재’의 강조에 불과하다.

‘황색 예수전’의 시인 김정환의 ‘고유명사들의 공동체’에는 ‘김정환 예술 산문집’이란 타이틀이 떡하니 붙어 있다. 눈에 거슬리지만, 김정환 자신이 거기다 갖다 놓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대는 살과 뼈와 피비린 인간의 모습./인간됨의 가장 비참한 모습” 하고 절규한 시로부터 20여년이 지났다. 그의 산문집에 붙은 ‘예술’ 산문집은, 솔직히 말해, 다소 궁색하게 보인다. 거기에 함께 묶인 글들을 보라. 어느 사회학자의 정년기념식 풍경에서부터 TV를 통해 부산아시안게임 북한대표단 입국을 지켜보는 장면, 소설가의 환갑 혹은 초상, 소재가 삶이거나 아니면 ‘책’, 음악, 미술, 공연, 연극, 조각 등 다양하다. 이건 그의 ‘그 됨’을 보여주는 흔적들이다.

6.5매 원고지의 빽빽하면서도 여유로운 활자들의 숨결을 따라가면서 마주치는 것은, 그 거침없는 질주, 호흡이다. 그것은 그가 자기 삶을 온전하게 불태우면서 살아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편력이기도 하고, 성장을 마친 성체의 확대재생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걸로는 충분치 않다.

그의 산문은, 그가 쓰는 산문은 김정환 자신이 중심축에 놓인 예술가 집단의 상호인식의 그물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서경식은 자기를 에워싼 외부 세계의 대상들과 마주하면서 결기를 다졌지만, 김정환에게는 그런 게 없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김정환을 둘러싼 세계는 긴장해야할 세계가 아니라, 아주 익숙한, 그의 표현을 따르면, ‘낯익음’의 세계다. 그런데 기묘하다. 그는 이렇게 직설한다. “궁상은 물론 가난 자체를 넘어, 마치 가난의 뼈를 깎은 듯한 비참이 이리 절묘하게 서정-풍경화한 적이 일찍이 있었던가.” 또는 “윤동주 이래 숱한 시인들이 ‘시 쓰는 자의식’을 시로 썼지만, 그중 어떤 시가 ‘행려’같은 여정을 치렀으며 이만한 종착역에 달한 적이 있는가? 형상화한 노동자의 서정적 자아가 포스트모던풍 ‘문학에 대한 문학’을 관통해버리는 광경이다.”라고. 이 거침없음과 낯익음의 세계가 어울려 있는 게 기묘하다.

“고유명사들은 풍부한 예술 ‘그림’을 매개로 각각 제 몸을 열며 다른 고유 명사들을 받아들이고 제 몸과 융화시키면서 ‘열린’ 공동체를 만들어갔고, 그 모양은 ‘낡게 닫힌’ 공동체론과 ‘완고한’ 일반론 혹은 일반명사에 시들해 있던 나를 꾀나 참신하게 감동시켰다.”라고 썼을 때보다, 나는 오히려 그가 “그는 갔고, 삽시간에 세상은 황량하다.”라고 이문구의 죽음을 슬퍼했을 때 더 매혹당한다. 그의 글이 빛나는 곳은, 대상을 자기화하는 순간에서다. 그가 시를 더 쓸 수 있을까 궁금하다.

김보일은 국어교사다. 그의 산문집에는 ‘어느 국어선생의 쓸모 없는 책읽기’가 부제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가 아무리 자유로운 濫讀, 막힘없는 책읽기를 강조해도, 그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쓸모’의 척도 위를 배회한다. 자신을 흔든 책들, 상식과 불편 사이를 오가면서 그의 글쓰기는 넘쳐난다. 거기에는 책과 책들이 서로 얽혀있고, 저자들이 서로 그물을 깁고 있다. 그건 분명, “모험을 추동하는 힘은 상식이 아니라 무모한 열정이며 탐닉이다. 바로 한계를 뛰어넘는 정신!”이라고 말하는 저자 자신의 ‘열정과 탐닉’의 편력이기도 하다.

그 목록은 이렇다. ‘에릭 호퍼 자서전’, ‘난초도둑’, ‘무소유’, ‘행복한 책읽기’, ‘침묵의 세계’, ‘문학 상상력의 연구’, ‘지상의 양식’, ‘사랑의 단상’, ‘시장은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청빈의 사상’, ‘잡초는 없다’. 끊이지 않는 이 목록이 그의 글을 풍성하게 만들지만, 한편으론 그가 매우 진지하고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세계의 허리를 잡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연어들과 크낙새들이 사라지고 풍물소리가 죽고 땅에 기반을 둔 향토의 문화가 사라져 가는 곳에서, 과연 웰빙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우리는 이미 많은 것들과 연루되어 있다. 끊임없이 욕망을 충동질하는 자본주의의 일상, 하나 둘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 없이는 웰빙은 없다.”라고 그가 썼을 때, 그가 강조하려는 것은 ‘연민’이다. 그에게 열정과 함께 연민이 있다는 건, 좀 더 지켜볼 일이다.

(독백으로서의 산문을 엿보는 일. 나아가 저 글쓰기의 세계에 포획된 ‘고유명사들의 공동체’를 들여다보는 일은, 담백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저자들은 나에게 이렇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누구냐?” 라고. 散文이 山門이 되는 순간이다.)

최익현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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