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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양성사회의 모색 - 『여자 남자 그리고 제3의 성』,『여성의 몸, 어떻게 읽을 것인가?』
[테마] 양성사회의 모색 - 『여자 남자 그리고 제3의 성』,『여성의 몸, 어떻게 읽을 것인가?』
  • 권경우 문화평론가
  • 승인 2001.05.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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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17 17:48:41
권경우 / 문화평론가

시몬느 드 보봐르가 ‘여성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 것은 1949년이었다. 이것은 여성이 공통된 ‘본질적인’ 특징을 갖는가 아니면 여성 개념 자체가 사회적 구성물인가 하는 페미니즘 진영의 해묵은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런데 보봐르가 정의한 ‘제2의 성(the Second Sex)’은 여성을 결핍과 열등의 존재, 즉 타자로 승인한 것이다. 즉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면서 여성 주체를 ‘문화적 구성’으로 파악한 점은 선구적이지만, 자아/타자, 주체/객체, 남성/여성, 정신/몸의 이분법적 분리라는 서구문화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여성 혹은 여성성과 관련된 문제는 점점 중요한 이론적 쟁점이 될 전망이다. 무엇보다도 이 문제가 인간의 근본적 정체성의 정치학과 맞물려 있다는 데서 비롯되는데, 앞으로의 과제는 피억압자로서 여성에서 출발했다 할지라도 ‘여성의 신화’에서 벗어남으로써 인간의 보편적인 윤리를 창조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성)에 대한 보다 정밀한 논의가 필수적이다.

여성의 몸, 이데올로기의 전쟁터

여성(성)을 다루는 데 있어서 그 중심은 ‘여성의 몸’이다. 몸은 수많은 경험을 각인한다는 점에서 물질적이고, 몸 자체가 말한다는 점에서는 초월적이다. ‘여성의 몸,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다양한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여성의 몸을 갈등의 장, 즉 대립적인 이데올로기의 전쟁터로 파악하고 있다. 책의 1부에서는 몸과 언어의 관계를 살피고 있다.
모이라 게이튼스(M. Gatens)는 ‘정치적 몸의(과) 육체적 대표성’이라는 글에서 정치적 몸(인간의 몸)이 사실은 남성의 몸에서 출발하면서 ‘한 목소리, 한 이성’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여성의 몸이 하는 말은 알아듣기 힘든 ‘히스테리 환자의 언어, 하이에나의 울부짖음, 야만인의 지껄임’이 되고 만다고 지적한다. 즉 여성의 몸이 드러내는 다성적 목소리가 억압당하는 현실을 고발한 것이다.
2부에서는 노예제에서 보디빌딩, 미술에서 뮤직비디오에 이르기까지 서구문화에서 만연된 여성의 상품화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분석하고 있다. 여기서 아네트 쿤(A. Kuhn)은 특히 여성 보디빌더의 몸이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주목하면서, 여성 몸의 형성방식과 욕망의 체계에 대한 저항의 즐거움까지 긍정하고 있다. 이에 대한 쿤의 문제제기는 “여성의 몸이 무엇인가? 여성의 몸이 무언가 달라지는 지점이 있는가? 특정 유형의 몸과 ‘여성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등이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적은 모니끄 위띠그(M. Wittig)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다. “가모장제는 가부장제만큼 이성애적이다. 달라진 것은 오로지 억압자의 성별일 뿐이다. 더욱이 이런 발상은 성별의 범주(여성과 남성)에 여전히 갇혀 있을 뿐 아니라, 아이를 낳는 능력(생물학)이 여성을 규정한다는 관념을 고수한다. … 따라서 우리가 이른바 억압이라고 부르는 것을 유물론적 관점에서 정의하고 여성들이 하나의 계급이라는 점, 즉 ‘여성’ 범주와 ‘남성’ 범주는 영구적인 범주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범주라는 점을 확실히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 그리고 오로지 우리만이 해낼 수 있는 역사적 과제다.” 여기에 필요한 일은 상상적 구성물로서 ‘여성’ 범주의 신화를 깨는 것이다. 위띠그의 논의는 보편적인 타자의 윤리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방향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여성의 몸…’이 보다 정밀한 분석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면, ‘여자 남자 그리고 제3의 성’은 남성과 여성(제2의 성)이라는 이원적 구분을 넘어서는 제3의 성으로서 ‘젠더역전’ 현상을 다루고 있다. 책의 부제는 ‘젠더역전과 젠더문화’. 이 책은 제3세계 주변부와 그 중심의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젠더역전 현상이 모든 역사와 문화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해 왔음을 밝히고 있다.

남성 여성 이분법 넘어서는 ‘젠더문화’

서론에 해당하는 소개글에서 편저자 라멧(S. P. Ramet)은 고대 그리스 신화의 테레시아스라는 예언자를 등장시킨다. 그는 남자로 태어났지만 기적처럼 여자로 변해 8년 동안 여자로 살다가 다시 남자로 돌아간 인물이다. 제우스와 헤라는, 성행위에서 어느 쪽이 성적 즐거움을 더 많이 느끼는가 논쟁을 하다가 양쪽 성을 모두 체험한 티레시아스에게 판결을 구한다. 그가 여자가 쾌감을 더 많이 느낀다고 말하자 이에 화가 난 헤라는 그의 눈을 멀게 한다. 그러자 제우스는 그 벌에 대한 보상으로 예언능력과 7세대 동안 살 수 있는 수명을 준다. 젠더역전의 상징으로서 테레시아스는 고대 신화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여러 사회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우선 젠더역전을 말하기 위해서는 젠더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이론에서 도출되는 ‘젠더문화’ 개념을 사용해야만 한다. 젠더문화는 젠더를 성기와 분리시켜 사회적 역할과 임무에 따라 구분함으로써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것이다.
메켄지에 따르면, “젠더는 가장 효과적인 사회통제 수단의 하나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주요한 모든 제도에 의해 강화되고 있는 이원적 젠더체제에 길들여진다.”

복수적 젠더 가능성의 인정

젠더의 역전은 전체적이건 부분적이건 간에 사회적 행위, 임무, 옷차림, 태도, 말버릇, 자기지칭, 이데올로기 등이 조금이라도 변해서 다른 젠더에 근접한 경우를 일컫는다. 즉 복수적 젠더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젠더역전에서는 이전의 과거를 지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1948년 남자로 태어난 성전환 주창자 본스테인(K. Bornstein)의 주장. “나는 ‘여자’의 느낌을 잘 모른다. 나는 여자로서 느껴본 적이 없다. 내가 남자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을 뿐이다.” 본스테인은 사회의 지배적인 젠더규정에 따르지 않으면서 일종의 ‘變奏’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확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과정중(passing)’일 뿐이다.
젠더의 정치학은 내재적인 측면과 외재적인 측면을 동시에 고려할 때 가능하다. 젠더역전은 성전환자, 비수술 성전환자, 복장전환자, 바꿔입는 사람 등 수많은 젠더변이 정체성들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다.
따라서 새로운 젠더의 구성은 두 갈래가 아니라 여러 갈래여야 한다. 남자, 여자, 남자-여자, 여자-남자 등등. 그러므로 사회적·문화적 구성물로서 젠더의 강조가 여전히 남성/여성이라는 이원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역시 하나의 억압이다. 그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젠더를 ‘가로지르기(traversing)’―’초월하기(transcending)’가 아니라―를 추구해야 한다. 단순히 위치이동만으로는 온전한 의미의 젠더역전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제 무게중심은 ‘多聲’의 긍정을 넘어 ‘多性’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을 질 들뢰즈의 표현으로 바꾸자면, ‘되기(becoming, 생성)’이다. 혁명은 자리바꿈이 아닌 가능성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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