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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도덕·인격의 三合…어려운 ‘참스승’의 길
학문·도덕·인격의 三合…어려운 ‘참스승’의 길
  • 정리: 전미영 기자
  • 승인 2001.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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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 제자가 나눈 이야기 : 단절의 시대를 이어온 사십년
원초적 혈연인 가족마저 해체의 위기 앞에 놓여있는 지금, 다른 관계의 단절은 굳이 말할 필요 없는지도 모른다. 사제 관계 역시 그렇다. 부모와 마찬가지로 스승을 섬기고, 자식과 같이 제자를 아끼던 전통을 케케묵은 옛것으로 치부해버리는 세태에서, 진리의 길을 평생 함께 걸으며 속 깊은 인생사를 나누는 사제관계는 드물어서 더욱 아름답고 귀하다. 한문학자이며 역사학자인 碧史 이우성 선생과, 제자인 임형택 성균관대 교수(한문학과)가 만나서 나눈 ‘참 스승, 참 제자’에 대한 이야기는, 40년 동안 함께 학문을 나눈 이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존경과 사랑의 나눔이었다.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이우성 선생을 일컬어 ‘文·史·哲을 겸비한 실천적 지식인’이라 한 바 있다. 임형택 교수를 비롯해 강단과 밖에서 두루 맺어진 제자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스승을 찾는다.

강단을 넘어 맺은 사제의 연
師: 나하고 임교수는 대학강단이 아니라 일정한 학문적 기반 위에서 맺어졌어요. 학문을 먼저 통한 뒤 인간적으로도 깊어진 경우이지. 지금까지 한문학 내지 문학사와 관계되는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면서 저서도 같이 냈는데, 시속에서 말하는 사제관계는 아니지만 내가 나이가 좀 많으니까 나를 스승이라 하는 것일테지.
弟: 선생님을 처음 찾아뵌 것이 제가 대학 4학년 때였으니, 벌써 36, 7년 되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대학에는 한문학 전공자가 없었고, 학문의 방법론과 시각에서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연구하는 분들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차에 선생님 논문에 감명 받고, 무턱대고 찾아뵌 것이지요.
師: 내 고향은 경상도 밀양이고 임교수는 전남 영암이라 지역적으로 멀고 어떤 인척관계도 아니니 순전히 학문적으로 맺어진 관계이지. 임교수가 자기 공부에 필요한 사람을 구하다 나를 찾게 된 것 같은데, 어느덧 사십년 가까이 되었다니, 참으로 오랜 세월이에요. 임교수와 최초로 공동작업한 것이 ‘李朝漢文短篇集’입니다. 나이도 젊고 감각도 새로워서 번역은 주로 임교수가 맡고, 한문에 대한 이해는 내가 조금 나으니까 원문 대조는 내가 했어요. 책을 세 권 냈는데, 수많은 고전들 가운데서 단편소설적인 성격을 가진 좋은 것들만 골라 책을 만드는 과정이 단순칠 않았어. 남이 볼 때는 낡은 고전인데, 작업을 해놓으니 현대적인 관점으로도 ‘참, 우리 고전이 훌륭하다, 참신하다’할 만큼 재미가 있었어요. 이미 돼있던 책을 뚝딱 내놓는 것이 아니라 자료를 뽑아서 새로 번역을 하고 제목을 붙이는 작업이라 몹시 힘들었지. ‘한문단편’이라는 용어도 그때 처음 생겼어요. 야담집에 있는 글들이 어떤 문학적 가치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을 때였지.
弟: 그 책을 통해 박사학위를 받은 이가 여럿이고 실제 작품 창작에 준 영향도 많은데, 대표적으로 황석영의 ‘장길산’, 김주영의 ‘객주’같은 것들은 그 책에서 착상을 많이 했고 어떤 장면들은 따다 쓰기도 했지요. 그 작업을 하면서 선생님과의 관계도 깊어졌지만 제 스스로도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師: 우리나라 한문학 고전들이 필사본으로만 있다가 해외로 많이 반출되었어요. 내가 해외에서 찾아 가져온 자료하고 임교수가 국내에서 발굴한 자료를 보태서 책을 만들게 되었지. 한문학에 대한 강의를 오래 해왔지만 그때는 한문학을 연구하려는 사람이 눈에 잘 띄지 않았어요. 모두들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졸업하고 그랬는데, 임교수가 한문학을 자기분야로 설정하고 자기 길을 개척해나가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참 흐뭇했어요. 인간관계도 따라서 깊어지고 내 기대도 크고, 여기까지 온 것이지.
弟: 갈수록 사제관계가 퇴락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師: 사제관계가 처음에 무엇으로 맺어졌는가, 그것이 중요해요. 학점으로 사제관계가 형성되었으니 대학 졸업하고 나면 연결 고리가 약해질 수밖에. 처음에 인간적으로, 정신적으로 맺어지면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지만, 요즘 교수학생 사이는 이해관계인 경우가 많지요. 또 같은 분야의 학문을 하더라도 사고방식이나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생각에 거리가 생기면서 인간관계마저 멀어지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되지요. 옛날 당쟁 시대에는 서로 유연성 없이 격렬하게 다투었거든. 물론 요즘이 당쟁 시대와 같다는 것은 아니지만, 제자가 스승의 이론을 비판할 때 스승이 비좁게 사고하면 문제가 많아지지. 제자도 스승의 사상과 학설을 비판하되 예를 갖추면 좋을텐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표현방법이 졸렬할 때가 있거든. 서로 반성하면서 유연성 있게 대처해나가야겠지.

진리의 보편성과 공평성
弟: 지금 대학 사회에는 갈등이 참 많습니다. 교육 제도 속에서 불가피한 면도 있겠지만, 사제 관계에도 그런 갈등들이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인데요, 학점을 주고 학위를 주는 위치도 일종의 권력이라 할 수 있거든요. ‘교수 권력’, ‘스승의 권력’을 행사하는 데서 갈등이 오기도 합니다. 이해로 맺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상충될 때는 심한 갈등을 빚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사제간의 도를 지켜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못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학문이라는 기본이겠지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진리의 보편성과 공평성에 입각해 정립돼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師: 물론, 제자가 스승의 견해를 얼마든지 부정할 수 있어요. 스승이 세운 학문의 문제를 이어서 다루는데, 그러다 보면 앞사람이 다룬 문제가 불충분해 보일 수도 있지. 그래도 앞사람의 것은 그만큼의 성과예요. 제자들은 마치 자기가 새로 다 하는 거라고 착각하기 쉽거든. 그것은 학문의 기술적인 문제 뿐 아니라 마음자세의 문제이기도 해요. 학문하는 자세의 기본은 겸손함이에요. 중요한 것은 스승이 마련해놓은 자리에서 오늘의 내가 연구자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이거든.
第: 제자나 후배에게 자신의 학설이 부정되는 것은 어쩌면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까요. 자신의 학문이 밑거름이 되어서 새로운 발전을 이루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師: 그것과 관련해 생각나는 일화가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학설과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니까 누군가가 왜 스승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펴느냐고 묻거든.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는 내 스승을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더욱 진리를 사랑한다’고 했어요. 스승을 사랑하지만, 진리를 더욱 사랑하므로 스승의 견해를 부정한다는 것이지. 스승의 견해를 부정한다고 해서 스승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거든. 내가 20대 때부터 늘 가슴에 품은 말이에요.
弟: 저는 다산과 황상 두 분의 관계가 뜻깊게 남습니다. 황상이 열 다섯 살 때 다산과 처음 만나고 60년 뒤인 75세 때 그 만남을 추억하면서 ‘壬戌記’라는 글을 씁니다. 다산이 황상에게 문학공부를 하라고 해서 황상이 ‘저는 재주도 없고 사람이 둔하여 어렵겠습니다’ 하니, 다산이 ‘너는 민첩하지 못해서 오히려 노력하면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답니다. 황상은 내가 크게 이룬 것은 없지만 선생님 앞에서 떳떳하게 글을 쓴다 했습니다. 돌아간 스승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다산, 그리고 공자
師: 논어에 보면 공자는 제자들에게 같은 주제를 다르게 가르쳐요. 제자들이 와서 仁이 무엇입니까 물으면, 사람에 따라 해석을 달리해준단 말이지. 그 중에 몸이 아픈 제자가 와서 仁을 물으니 仁에 대한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고 ‘부모는 오직 자식의 병을 걱정한다’했어요. ‘그러니 너는 부모가 걱정하지 않도록 네 몸부터 챙겨라, 너에게는 그것이 仁이다’는 것이지. 제자들의 개성과 처지에 따라서 가르침이 다 달라. 퇴계도 그랬고, 큰 스승들은 다 그런 식으로 가르쳤지.
弟: 퇴계도 율곡도, 제자들이 스승의 언행록을 꾸렸지 않습니까. 사실은 그게 학문 전수보다 더 중요한, 살아있는 전수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찾아보기가 힘들지요.
師: 지금은 도덕적·학문적으로 숭고한 것을 제자들에게 남겨주는 선생이 적기 때문에 그렇다고 봐요. 언행록이란 것은 한 선생이 돌아갔을 때 스승의 평소 말씀과 행동을 영원히 거울로 삼아야겠다고 제자들이 만드는 것인데, 그런 스승 되기가 어디 쉽겠는가. 학문적으로는 전문가라 해도 그분의 인간됨까지 돌아보았을 때 과연 내 스승이로구나, 하는 분이 있기가 어려운 세상이지.
弟: 스승 노릇하기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師: 제자 노릇보다 훨씬 어렵지.
弟: 제자들이 스승을 많이 비판하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 스승의 잘못을 그대로 따라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이지 않게 스승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오히려 제자노릇 탓하기 앞서서 참다운 스승이 무엇인지를 먼저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師: 임교수가 스승 노릇하기 어렵다는 말은 진짜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야. 임교수가 강단에 선지 벌써 수십 년 아니신가. 참스승이 된다는 것은 우선 학문을 제대로 하고, 도덕적·인격적으로도 제자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스승이 된다는 것이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요.

다산이 황상에게
다산이 황상에게 文史를 닦도록 권하였는데, 황상은 머뭇머뭇 부끄러운 표정을 짓더니 “저는 세 가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둔하고(鈍) 둘째로 막혀있고(滯), 셋째로 미욱합니다(滯)”라고 대답한다. 다산이 그에게 이르기를 “공부하는 자에게 큰 병통이 세 가지 있는데 너에게는 해당되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첫째 외우기를 빨리 하면(敏) 그 폐단은 소홀히 되며, 둘째 글짓기에 빠르면(銳) 그 폐단은 부실하게 되고, 이해를 빨리 하면(捷) 그 폐단은 거칠게 된다. 무릇 둔하면서 파고드는 자는 그 구멍이 넓어지며, 막혔다가 소통이 되면 그 흐름이 툭 트이며, 미욱한 것을 닦아내면 그 빛이 윤택하게 되는 법이다. 파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부지런이요, 소통은 어떻게 하느냐 부지런이요, 닦기는 어떻게 하느냐 역시 부지런이다, 이 ‘부지런’은 어떻게 다할 수 있느냐? ‘마음가짐을 확고히 하는 것(秉心確)’이다. “황상은 다산이 내린 이 글을 ‘三勤戒’로 마음에 새겨 평생을 잊지 않고 지켰고, 스승을 만난 지 60년이 된 해에 지은 ‘壬戌記’속에 스승의 글을 인용했다. “금년은 내 나이 75세다. 세상에 남은 날이 많지 않은데 어찌 잘못된 길로 마구 나아가겠는가! 이제부터서는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을 것임이 확실하다. 소자는 선생님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라고 글을 끝맺고 있다.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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