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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기후위기∙불평등… 돌아갈 ‘올드노멀’은 원래 없었다
민주주의∙기후위기∙불평등… 돌아갈 ‘올드노멀’은 원래 없었다
  • 박강수
  • 승인 2021.06.08 22: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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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노멀 시대, 한국 민주주의의 길을 묻다
6.10 민주항쟁 34주년 기념 학술토론회 '뉴노멀 시대, 한국 민주주의의 길을 묻다' 발표자로 나선 (왼쪽부터) 박성인 서울대 교수, 서복경 더가능성연구소 대표, 신진욱 중앙대 교수.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10 민주항쟁 34주년 기념 학술토론회 '뉴노멀 시대, 한국 민주주의의 길을 묻다' 발표자로 나선 (왼쪽부터) 박성인 서울대 교수, 서복경 더가능성연구소 대표, 신진욱 중앙대 교수.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마치 이전에 ‘노멀’한 민주주의가 있었는데 코로나19바이러스라는 외부의 적이 등장해 완전히 새롭고 낯선 ‘뉴노멀’을 낳았다고 가정하고, ‘이 뉴노멀이 도대체 뭐냐’고 묻는 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한국민주주의연구소가 8일 주최한 6.10민주항쟁 34주년 기념 학술토론회에 발표자로 나선 신진욱 중앙대 교수(사회학과)의 말이다. 팬데믹 재난 상황을 수습한 뒤에 되돌아갈 ‘정상 상태’라는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현재의 위기들은 새롭게 촉발된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연장된 것이라는 분석이다. 즉, “뉴노멀이 아니라 롱노멀”이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팬데믹 시대 정치의 세계적 위기, 기후위기 대응, 불평등과 경제구조 개혁을 주제로 세 편의 발표가 진행됐다. 발표자들은 정치, 생태, 경제 각 분야에서 한국사회가 누적된 문제들을 해결할 타이밍을 놓쳐 왔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 2부 토론 진행자로 나선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뉴노멀 시대, 민주주의의 길을 묻다’라는 토론회 제목에 대해 “(한국사회가) 30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물었어야 하는 지체된 물음 아닌가 싶다”라고 말하며 발표자들의 문제의식에 공감했다.

 

부식되는 민주주의와 불안정한 시민사회

 

첫 번째 발표를 맡은 신진욱 교수는 ‘민주주의 위기’라는 세계적 흐름을 요약하며 이 변화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20세기 말부터 △정치 체제 △정당 정치 △시민 운동 세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위험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체제 면에서 “민주주의 자체는 부정하지 않으면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민주주의를 변질시켜 허무는 유사 민주주의, 결손 민주주의, 포스트 민주주의 등이 나타났다”고 신 교수는 설명한다. 민주주의가 과거의 쿠데타∙독재와 같은 형태로 부정되지는 않지만 교묘한 방식으로 부식되고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그는 “90년대 이후 선거를 치르는 민주제는 늘었지만 실질적 시민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민주제의 비중은 줄었다”고 밝혔다.

 

"코로나19라는 쇼크에 의해 기존의 불안정한 상태에서 무게 중심이 어느 방향으로 이동했다고 보지 않는다. 권위주의와 민주주의 중 한쪽으로 기울었다고 보기 어렵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코로나19라는 쇼크에 의해 기존의 불안정한 상태에서 무게 중심이 어느 방향으로 이동했다고 보지 않는다. 권위주의와 민주주의 중 한쪽으로 기울었다고 보기 어렵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신 교수는 또한 “정당 간 경쟁 구도의 복잡성이 증가했다”면서 과거에는 상호 협상이 가능한 중도 좌파, 중도 우파 정당이 중심이었다면 오늘날은 더 급진적인 포퓰리즘 세력이 제도권 정치의 유력한 선수로 대두됐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그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역시 선거 투표율은 점점 떨어지는 반면 직접적인 항의 행동은 늘어나면서 시민 사회 내부가 정치적으로 과잉되고 양극화됐다고 봤다. 신 교수는 “제도 정치 내 양극화와 시민 사회의 양극화가 연계해 담합구조를 형성하면서 여기에 들어오지 못한 다수 대중을 공론장에서 소외시켰다”며 늘어난 시민 참여의 양면적 성격을 짚었다.

이처럼 코로나19 이전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가 처한 상황은 “좋게 말하면 역동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고도로 불안정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팬데믹은 그 역동성∙불안정성에 불쏘시개가 됐고 이는 기존의 문제를 심화시키거나 체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이를테면 코로나19 팬데믹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원래 권위주의적이었던 국가는 더 권위적인 방향으로, 원래 민주주의였던 국가는 더 민주적인 방향으로 휩쓸리게 됐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부식되는 민주주의, 정당체제의 불안정성, 시민사회의 행동주의 확산 등 기존 민주주의의 문제들은 재난의 시기에 더 심각해졌고 우리는 근본적 전환에 이르지 못했다”며 “이야말로 포스트코로나 시대 가장 중요한 성찰의 주제”라고 강조했다.

 

기후위기 대응이 생태권위주의로 치닫지 않으려면

 

두 번째 ‘기후위기 대응과 민주주의의 문제들’ 발표를 맡은 서복경 더가능연구소 대표는 ‘기후악당국가’ 한국의 암울한 현실을 질타했다. 한국은 주요 OECD 국가의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에서 터키와 더불어 90년대 이후 가장 가파른 증가세를 기록 중인 나라다. 지난해 10월 부랴부랴 정부 차원에서 ‘2050 탄소중립 선언’을 내놓고 올해 4월 유엔기후행동정상회의에서는 상향된 온실가스 국가감축목표(NDS)를 제출하겠다고 밝힌 배경에는 국제 사회의 따가운 눈총과 압박이 있는 셈이다. 여기에 더해 한국은 철강, 석유화학 등 온실가스 배출량이 높은 제조업에 주요 산업이 몰려 있다. 모든 석탄화력 시설을 폐쇄할 경우 좌초자산이 가장 많은 국가다. 서 대표는 “(따라서 한국은 탄소중립에 따른) 피해도 제일 크고, 저항도 가장 격렬하고, 결정도 그만큼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탄소중립은 눈 뜨고 일어나서 눈 감고 잘 때까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전환해야 하는 과제다. 이것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전환 비용은 누가 감당하나, 시민들 동의는 어떻게 받아내나, 이 모든 것은 민주주의의 문제다." 서복경 더가능성연구소 대표.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탄소중립은 눈 뜨고 일어나서 눈 감고 잘 때까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전환해야 하는 과제다. 이것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전환 비용은 누가 감당하나, 시민들 동의는 어떻게 받아내나, 이 모든 것은 민주주의의 문제다." 서복경 더가능성연구소 대표.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으로서는 “목에 칼이 들어온 상황”이지만 “선언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것이 서 대표의 평가다. 그는 특히 탄소중립이라는 과제를 “어떻게 추진해 나갈 것인가라는 민주주의의 문제”에 대한 정부의 인식과 대책이 보이지 않는다고 우려한다. 지난해 12월 발표된 ‘2050 탄소중립 추진전략에는 “탄소중립 사회에 대한 국민인식 제고”가 10대 과제 중 하나로 들어 갔다. 서 대표는 “인식만 제고하면 되는 것인가”라며 “탄소중립은 전 사회를 전시 상태로 만드는 엄청난 갈등 상황을 매년 유발할 문제다. 이 전환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지, 시민들의 라이프 사이클은 어느 정도 속도로 얼마나 바꿔나갈지에 대해 어떻게 시민적 동의 기반을 형성해 나갈지 계획이 하나도 없다”고 비판했다.

서 대표는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이 메가 프로젝트의 관리자가 시민이 아니게 될 수 있다. 생태권위주의가 도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인류 문명의 발전을 위해서 좋은 권위주의는 정당할 뿐 아니라 필수적”이라는 정치학자 마크 비슨의 문장을 소개하며 민주주의가 기후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팽배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서 대표는 이 문제를 민주적으로 풀어내기 위해서는 “더 작은 단위에서 더 다양한 형태로 숙의가 가능한 민주주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하며 “정부가 결정하고 시민이 투표하는 방식으로 풀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전환을 위해서는 (이 문제가) 먹거리, 일거리 등 삶의 일부로 들어와 시민이 주체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출산∙노인빈곤∙양극화 해결하려면 경제개혁부터

 

박상인 서울대 교수(행정대학원)는 마지막 세 번째 발표에서 한국의 다양한 사회경제적 불행의 기원에 임금 소득 불평등과 재벌 중심 산업 체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1994년 이후 악화되기 시작한 한국 소득 불평등의 기본적인 원인은 임금 소득 불평등”이라며 “중소기업-대기업, 비정규직-정규직의 임금 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일본에서 중견기업 평균임금은 대기업의 88%,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84% 수준인데 반해 한국에서는 각각 70%, 57% 밖에 되지 않는다. 아울러 비정규직 근로자의 경우 고용보험이나 국민연금에 가입된 비율도 낮기 때문에 공적 자금을 통한 재분배 효과도 미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박 교수의 해석이다.

 

"한국의 밴처기업 매출을 보면 중간재 납품하는 B2B가 75%, B2C가 4.3%를 차지한다. 한국의 유니콘 기업은 전부 B2C, 4.3%에서 나온다. B2B가 이렇게 큰데(75%) 혁신이 없다. 산업 진화의 단절이다. 경제 구조를 개혁해야 지속 가능한 발전, 생산성 향상도 가능하다." 박상인 서울대 교수.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의 밴처기업 매출을 보면 중간재 납품하는 B2B가 75%, B2C가 4.3%를 차지한다. 한국의 유니콘 기업은 전부 B2C, 4.3%에서 나온다. B2B가 이렇게 큰데(75%) 혁신이 없다. 산업 진화의 단절이다. 경제 구조를 개혁해야 지속 가능한 발전, 생산성 향상도 가능하다." 박상인 서울대 교수.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 구조적 수렁의 원인으로 박 교수는 재벌을 중심으로 수직계열화된 산업 생태계를 지목한다. 그는 “90년대 경제위기 이후에 개별 산업의 독점 체제가 강화됐다. 현대기아차의 경우 한국 자동차 시장의 80%를 독점한다”면서 “(독점시장에서) 하청업체는 전속계약을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원청 기업은 자재의 원가 구조를 거의 다 파악해 단가 후려치기, 기술 탈취를 한다”고 분석했다. 이어서 박 교수는 “현대차 수익률이 100이라면 1차 하도급 기업은 60~66이고 2차 하도급 기업은 30~32 수준”이라며 “이 본청-1차-2차 수익률 격차가 노동자의 임금 격차와 거의 똑같다”고 밝했다. 단가 후려치기가 고스란히 임금 소득 격차에 반영된 것이다.

박 교수는 청년 실업, 저출산, 노인 빈곤, 자영업 과잉 등 문제가 모두 이 구조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혁신 없이 단가를 낮춘 가격경쟁력 중심으로 제조업을 유지하다보니 연공 서열이 높아진 사무직을 빨리 내보내게 되고, 이들은 다시 자영업 시장으로 유입된다. 이들이 망하면 그대로 노인 빈곤층이 된다. 이 생애주기적 비극을 목격한 청년들은 공시족으로 몰리고 30대 중반에서야 취업하는 경우가 속출한다. 기껏해야 50대 초반까지 일할 이들의 근속연수는 20년 안팎이다. 연금이랄 게 쌓이지 않는다. 복지가 기능하지 않는 악순환이다. 박 교수는 “임대료 보조가 자영업 대책이 아니고, 노인 일자리가 노인빈곤 대책이 아니다”라며 "재벌 대기업 중심의 경제 권력을 해체하는 일이 근본적인 처방"이라고 말했다.

 

 

박강수 기자 pp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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