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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농경문화의 유사성 주목
동서양 농경문화의 유사성 주목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1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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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산책 : 전근대'농경사회' 분석한 두권의 책

『농민의 도덕경제』(제임스 스콧 지음, 김춘동 옮김, 아카넷 刊, 2004, 386쪽)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카를로 긴즈부르그 지음, 조한욱 옮김, 길 刊, 368쪽)

도덕경제(moral economy)는 E.P. 톰슨이 18세기 영국의 식량폭동의 원인과 과정을 해명하기 위해 발명한 개념이다. 사회적 문화적 제 관계로부터 격리된 근대의 물질적 경제개념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스콧의 이 책은 톰슨의 개념을 동남아 농민운동에 적용해 그 외연을 확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저자는 식량부족에 대한 두려움이 혁신에 대한 저항, 수지타산과 무관해 보이는 토지소유에 대한 열망, 사람들과의 관계, 국가를 포함한 기관들과의 관계 등과 같은 농민사회에서 나타나는 기술적, 사회적, 도덕적 배열을 설명해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진행된 동남아의 식민지배 강화는 생계유지를 위해 그 당시 농민들이 관습적으로 정해놓은 ‘도덕경제’ 관념의 하한선을 침범해 ‘저항’이라는 극단적 수단을 불러왔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인데, 이것은 위기국면에 처한 농민의 행위와 의식을 단순한 물질적 관계뿐 아니라 그와 결합된 사회관계나 가치규범, 도덕과 관습, 종교적 믿음과 의식들로 이뤄진 미시적 수준에서 규명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특히 서구경제와 제도를 ‘결여’한 전통사회가 아니라, (시쳇말로 ‘관습헌법’ 같은)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전통적 경제관념과 제도의 파괴과정으로 시장경제와 행정체계가 이식된 순서를 추적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남다르다.

이 책은 톰슨이 18세기 영국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을 20세기 동남아에 적용하는 게 적절한가를 두고 학계의 논쟁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역자에 따르면 스콧과 톰슨이 파악하는 민중(농민)들의 도덕경제는 △지역사회(촌락, 시장) 단위로 기능하고, △민중과 지배엘리트 사이에 호혜성의 규범이 있고, △공유재산을 물질적 기초로 보고, △전통과 관습을 문화적 기반으로 한다는 점 등에서 일치한다. 하지만 생계의 수준이 역사적, 문화적으로 다양하게 결정되고, 피지배민중이 처한 상황이 다른 점들이 충분히 고려된다면 도덕경제 같은 보편적 뉘앙스가 풍부한 개념은 자유롭게 적용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가령 이 책은 동남아 농민들이 ‘착취’를 “잉여가치의 수탈이라는 일반적 문제”가 아니라 “수탈한 다음 생계를 유지할 만큼 남기는가 혹은 결핍을 보전해줄 장치가 작동하는가”에 따라 바라봤다는 점 등을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경제적 공포가 나중에 전통으로 해석되고 문화적 관념으로 의식과 행위를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치즈와 구더기’를 펴내 미시사의 창시자로 알려진 긴즈부르그(*긴즈부르그는 그동안 한국에 진즈부르그로 잘못 알려져 왔는데, 번역자 조한욱 교수가 본인에게 직접 문의한 결과 '긴'이 맞고 그렇게 불러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제 긴즈부르그로 고쳐서 통일해야 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가 27세에 쓴 박사논문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 또한 전혀 다른 맥락에서 농경사회에 대한 비슷한 결론을 끌어내고 있어 신비로운 일치감을 안겨준다. 이 책은 종교개혁으로 흉흉한 시절 마녀재판을 비롯한 각종 이단재판에 나타난 심문관과 피고인의 문답기록을 통해 한 마을의 전통적인 풍속을 복원하려는 노력의 결과다. 저자는 기독교의 권위가 아무리 대중의 무의식까지 침투한 사회일지라도 자연에서 최대의 생산량을 끌어내려는 ‘풍요’에 대한 농민들의 迷信을 없애지는 못한다고 말하려는 듯하다. ‘베난단티’(흔히 마녀로 번역되는)는 16세기 이탈리아 북부의 한 작은 마을에서 풍작을 기원하는 전통의례가 마을과 마을의 ‘싸움’이라는 형식으로 바뀌어가고, 그 싸움이 ‘마녀’라는 상징물을 고안했다는 점, 그 마녀는 또한 ‘마술’을 통해 풍년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통과의례적인 민중들의 종교적 멘탈리티에서 자라나온 것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농민들은 조상 전래의 토템에 기독교의 교리들을 뒤섞어서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 두 책은 경제학과 인류학의 종합을 통해서, 그리고 민중의 의식이 잘 드러나는 사료의 수집과 분석을 통해서 어떻게 ‘역사의 진실’을 만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한국의 경우도 과거의 농경사회 및 현재 와해되고 있는 농촌의 집단문화, 무형문화에 대해서 이러한 다양한 분석틀과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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