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4 13:05 (수)
[이책을 주목한다] 『옥시덴탈리즘』(사오메이 천 지음, 강 刊)
[이책을 주목한다] 『옥시덴탈리즘』(사오메이 천 지음, 강 刊)
  • 이세영 기자
  • 승인 2001.05.1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1-05-17 17:49:39

1992년, 미국에 정착해 불과 4년만에 엄청난 부와 성공을 거머쥔 가난한 중국여인의 ‘자전적 이야기’가 중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맨해튼의 중국여인’이란 이름의 이 자전소설이 형상화하고 있는 것은, 이미 우리문학에선 진부한 소재가 되어버린 ‘아메리칸 드림’이다.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이 책이 중국의 일반독자들 뿐 아니라 평론가와 비판적 지식인들로부터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왜 사회주의 국가의 지식인들이 그 진부하고 속물적인 ‘아메리칸 드림’ 앞에서 스스로를 ‘무장해제’하고 마는가.

사오메이 천의 ‘옥시덴탈리즘’(정진배·김정아 옮김)은 중국 외부의 ‘좌파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다소간의 ‘희망 섞인’ 중국상을 여지없이 깨뜨리고 만다. 그가 그려내는 중국 지식인들의 의식세계는 결코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신봉하는 ‘사회주의 인텔리겐챠’나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유기적 지식인’의 그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국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곤핍에 염증을 느끼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전략적 행위자’에 가깝다. 물론 이것이 섣불리 비난받을 일은 못된다. 저자의 지적대로, 중국 지식인들의 사고와 행위는 오직 그들이 속해있는 지역적·문화적 맥락 속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옥시덴탈리즘’이란 표제에서 감지되듯 이 책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의식하고 씌어졌다. 사이드에 따르면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인들이 동양을 바라보고 재현하는 방식’을 지칭한다. 사이드는 이러한 ‘서양인들의 동양 재현’이 어떻게 서구의 제국주의 정책을 지탱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다시 서양의 정치적·문화적 식민지(동양)에 유입됨으로써 동양인의 관점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폭로한 바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옥시덴탈리즘’은 ‘서양에 대한 동양인들의 재현방식’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정확히 ‘오리엔탈리즘’과 倒立하는 비서구인의 담론전략을 지칭한다.

‘오리엔탈리즘’에서 구한 영감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사이드의 논의와 명확한 차별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사이드의 논의가 담론이 갖는 맥락성과 기능적 이중성을 무시하는 과오를 저지르고 있다고 보는 까닭이다. 저자가 볼 때, 오리엔탈리즘에는 서양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오리엔탈리즘도, 거기에 저항하는 오리엔탈리즘도 존재할 수 있다. 동일한 구도가 그것의 ‘거울상’인 옥시덴탈리즘에도 적용되지 않을 리 없다.

주로 중국의 사례를 인용해 개진되는 저자의 논의를 요약하면, “옥시덴탈리즘은 중국 국내정치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중국 사회 내의 다양하고 경쟁적인 집단들에 의해 환기된…억압의 담론인 동시에 해방의 담론”이라는 것. 억압의 담론으로서 옥시덴탈리즘은 ‘제3세계-반제국주의’라는 중국정부의 공식 이데올로기를 통해 작동된다. 저자는 이것을 “자국 국민에 대한 내적 억압기능을 수행하는” 관변 옥시덴탈리즘이라 규정한다.

이것의 맞은 편에 국가나 당기구가 아니라 다양한 비판적 지식인들에 의해 유포되는 반관변 옥시덴탈리즘이 있다. 이것은 ‘맨해튼의 중국여인’에 형상화된 서구에 대한 이미지(아메리칸 드림)를 통해 전형적으로 드러나는데, 저자는 그것을 “서양적인 것에 관한 동경의 표현이 아니라…압제와 부정이 없는 중국에 관한 열망의 표현”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반관변 옥시덴탈리즘은 저자에 의해 “서양이라는 타자를 전체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적인 억압에 저항하는 일종의 정치적 해방에 대한 은유로 이용하는 강력한 반관변 담론”으로 자리매김된다.

이 책에서 흥미를 끄는 부분은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저자의 평가다. 그는 사이드의 논의에 등장하는 동양이 “반쯤은 서양화된 동양이며, 따라서 중국인이나 한국인과 같은 ‘진짜’ 동양인들이 사이드 이론의 편파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짜’ 동양인인 우리들이 보기에 이 책의 전언 역시 ‘논쟁적’이기로는 사이드의 그것에 못지 않다. ‘구체적 현실’과 ‘체험’을 강조하는 저자의 진술은 정련된 관점이나 방법론적 대안을 제시한다기보다 그저 ‘경험적 반증사례‘를 열거하거나 ‘뒤집기’라는 수사학적 전략에 안주하는 듯한 인상을 쉽사리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담론이 생산되고 수용되는 콘텍스트가 과연 텍스트 자체나 텍스트가 구현하는 담론의 효과(그것이 정치적이건 문학적이건)보다 과연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하는지도 여전히 의문이다.
이세영 기자 sylee@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