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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시처럼! 회화는 회화처럼!
시는 시처럼! 회화는 회화처럼!
  • 이승건
  • 승인 2021.06.10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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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콘』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 윤도중 옮김 | 나남 | 2008 | 279쪽

레싱, 라오콘 논쟁을 일으키다

계몽주의의 대표적인 극작가이자 평론가로서 독일 문학 및 연극의 근대화를 촉진시킨 인물인 레싱(G.E. Lessing, 1729~1781)은 〈라오콘 군상〉(기원전 150~50년경, 헬레니즘 시대, 높이 242cm)에 대한 빈켈만(J.J. Winckelmann, 1717~1768)의 해석(『그리스 회화와 조각에 있어서 모방에 관한 연구』(Gedanken über die Nachahmung der griechischen Werke in der Malerei und Bildhauerkunst, 1755))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한 권의 책(『라오콘 또는 시와 회화의 한계에 관하여』(Laokoon oder über die Grenzen der Malerei und Poesie, 1766))을 내 놓는다. 이 책의 부제(副題)인 ‘시와 회화의 한계’에서도 읽히듯이, 레싱은 이 책의 출판으로 말미암아 예술의 개별 장르로서 시와 회화의 긴장 관계에 대한 학문적 논쟁의 역사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총29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그가 ‘그리스의 볼테르’라고까지 지칭한 시모니데스(Simonides, 기원전 556~468)의 대구, 즉 ‘시는 말하는 회화요, 회화는 말없는 시이다’에 대한 무조건적 신봉의 경향과 그로부터 생겨날 오해의 가능성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취한다(머리말, 12쪽~13쪽). 다시 말해, 그가 살았던 당대에 이르기까지 회화에 대한 시의 맹목적인 우월성에 대해, 그리고 회화의 영역에서 시의 영역에의 무분별한 흠모에 대해, 이 두 예술 간의, 더 나아가 공간예술과 시간예술 간의 유사성과 차이성에 집중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제1장 첫 문장부터 “회화와 조각에서 그리스 걸작들의 두드러진 일반적 특징을 자세뿐만 아니라 표정의 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성”이라고 본 빈켈만을 언급한 후(머리말, 25쪽), 빈켈만의 그리스 회화와 조각에 있어서 모방에 관한 연구를 길게 인용해 가며 〈라오콘 군상〉을 이해하는 빈켈만의 방식에 대해 “나는 감히 의견을 달리한다.”(머리말, 26쪽)고 선언한다. 즉, 그리스인들의 정신에 따라 라오콘의 모습을 위대하며 침착한 정신의 표현으로서 그 평정함을 논하고 있는 빈켈만과는 달리, 레싱은 그리스인들의 그 위대한 정신이 격동적인 감정적 표현을 할 수 없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조형예술 영역에서의 형식미(“아름다움이야말로 고대 그리스에서 조형예술의 최고 법칙”, 제2장, 36쪽)에 대한 요구가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라오콘 군상〉에 대한 빈켈만과 레싱의 견해 차이에 대해 미술사학자 쿨터만(Udo Kultermann, 1927~2013)은 ‘라오콘 논쟁(Der Laokoon-Streit)’이라고 명명하고 있다(Geschichte der Kunstgeschichte, Econ-Verlag GmbH, Wien und Düsseldorf, 1966, 제4장).

레싱, 시와 회화의 경계를 분명히 하다

서양미학에 있어서 시와 회화에 대한 관계적 고찰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는 두 개의 고전적 원형이 존재한다. 하나는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Horatius, 기원전 65~8)의 ‘시는 회화처럼(ut pictura poesis)’(Ars Poetica, 361f)이며, 다른 하나는 플루타르크(Plutarch, 45~125)가 전하고 있는 시모니데스의 말로써 “시는 말하는 회화요, 회화는 말없는 시이다”(De gloria Atheniensium, Ⅲ, 346f~347c)라는 대구이다. 후자는 레오나르도(Leonardo da Vinci, 1452~1519)에 의해서 “시는 눈 먼 회화요, 회화는 눈 뜬 시이다”로, 전자는 미술이론가들에 의해서 ‘회화는 시처럼’(ut poesis pictura)이라고 읽혀지기를 기대하면서 빈번히 열광적으로 인용되었다. 레싱의 『라오콘』은 이러한 연구 대열에서 ‘시는 시처럼’(ut poesis poesis), ‘회화는 회화처럼’(ut pictura pictura)을 주장하는 듯 보인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번역서의 제목(『라오콘 : 미술과 문학의 경계에 관하여』)을 영역본이나 일역본처럼 ‘시와 회화’로 삼지 않은 데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왜냐하면, 레싱 스스로가 “회화는 조형예술 전체를 가리킨다는 것을 밝힌다.”(머리말, 15쪽)고 얘기하고 있지만, 빈켈만과의 관계에서나 ut pictura poesis의 논쟁사의 위상에서 본다면 문학(시간예술)과 미술(조형예술로서 공간예술) 보다는 예술의 개별 장르로서 ‘시’와 ‘회화’로 읽어야 할 부분이 더 많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원전의 독일어 ‘Nachahmung’(영어, imitation)을 ‘묘사’로 번역(예를 들어, 머리말, 13쪽 ‘묘사의 대상과 방식’ 등)하고 있는데, 이 또한 동일한 이유에서 ’모방’으로 읽혔으면 한다. 그리고 번역서를 출간하면서 참고한 국내 번역본 7권(일러두기, 18쪽) 외에, 레싱의 『라오콘』과 함께 꼭 읽어야 하는 빈켈만의 『그리스 회화와 조각에 있어서 모방에 관한 연구』(레싱의 번역서 출간 5년 전에 번역(민주식 옮김, 『그리스 미술 모방론』, 이론과 실천, 2003)이 되어 있던 만큼)가 함께 제시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고전 서적의 번역서는 읽기에 매우 난해하다. 특히 서양 고전서의 경우 그리스ㆍ로마의 신화나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문학 및 미술 작품을 저변에 깔고 저자만의 독특한 시각을 곁들여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일일이 그 결에 따라 표현을 짚어가며 읽어야 하기에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고전 번역서의 경우 옮긴이의 역주는 책읽기의 깊이나 폭을 넓히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 번역서 역시 각 장마다 ‘편집자 주’와 ‘옮긴이 주’를 통해 독서의 즐거움을 배가시키고 있다. 다만, 제2장 첫 문장 “조형예술에서 최초의 시도가 사랑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전설일 수도 있고 사실일 수도 있다.”의 ‘편집자 주’(“어떤 처녀가 이별한 애인의 실루엣을 벽에 그리고, 도공인 그녀의 아버지가 그 그림에 진흙을 부어 최초의 부조를 만들었다는 그리스 전설이 있다.”(32쪽))의 내용은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ondus Maior, 23~79)의 『박물지』(Naturalis Historiae, XXXV, 15~16 및 151)가 출처인 바, 덧붙이면 이러하다. 즉, 코린토스에서 도기를 구워 팔던 시키온의 도공 부타데스(Butades)의 딸 디부타데스(Dibutades)가 사랑하는 연인의 출정을 앞두고 지하실에서 호롱불에 비친 애인의 모습을 윤곽선으로 그려내었다고 한다. 이로써 그녀는 최초의 화가가 되었고, 아버지 부타데스는 딸이 그린 소묘 위에 찰흙을 발라 붙여서 최초의 조각가가 되었으며, 작품은 코린토스 시가 로마에 의해 함락될 때까지 그곳에 보존되어 있다가 로마의 집정관 뭄미우스(Mummius)에 의해 님파이온으로 옮겨졌다고 전하고 있다. 특히 이 부분은 회화의 기원(그림자 그림)을 말할 때 자주 인용되곤 한다.

레싱의 『라오콘』에 대한 현대적 평가

시와 회화의 상호장력작용에 관한 인문학적 연구에 몰입한 리(Rensselaer W. Lee)는 그의 저서 『시는 회화처럼 : 회화의 인문주의적 이론』(UT PICTURA POESIS : The Humanistic Theory of Painting, The Norton Library, New York, 1967)에서 16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 사이에 기록된 유럽의 예술비평에 있어서 미술과 문학에 대한 논고들은 항상 회화와 시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진술한다. 더욱이 ‘ut pictura poesis’라는 제목을 걸고 이 부분에서 논의를 형성시켰던 비평가들을 연구함으로써, 그들에게서 회화가 인간의 삶의 진지한 해석자로서 시와 똑같은 등급으로 평가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특히 레싱에 대해서는, 18세기 중엽에 예술비평과 예술제작 모두에서 보여 지는 심각한 혼동을 제거하기 위해 시와 회화를 재정의 하고 그것들의 적절한 경계를 설정하려 『라오콘』을 집필했다면서, 그를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마지막 거류지(화가 레이놀즈와 함께)로 평가한다.

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

시와 회화의 경계에 관한 레싱의 견해를 참조하는 현대적 반향은 강력하다. 먼저 모더니즘 미술비평의 권좌에 오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는 당시 혜성처럼 등장한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 류의 추상표현주의 회화에 대해 예술의 개별 장르로서 회화가 갖는 정체성(평면성, 탈환영성 등 순수성)의 개념에서 옹호한다. 예술의 순수성은 그 특정 예술의 매체가 지닌 한계를 기꺼이 수용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그의 자세는 『라오콘』에서의 시와 회화예술의 경계에 관한 레싱의 견해로부터 얻어낸 착상이다. 특히 그는 회화와 조각 간에도 엄연한 경계가 있음에 주목하여, 레싱이 〈라오콘〉 조각상을 통해 조형예술 전체를 바라 본 관점을 비판함과 동시에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 옛날 레싱이 시와 회화에 대해 날카로운 자세를 취했던 것처럼, 그는 모더니즘 예술로서 추상표현주의 회화에서의 탈조각화를 회화의 고유한 본성으로 여기는 관점에서 회화의 순수성을 바라보아(“Towards a Newer Laokoon", Partisan Review, 1940), 이 예술의 정체성에 입각한 ‘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예술작품이 되기 위한 특별한 방식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대의 다원주의적 예술의 큰 흐름 속에서 디지털 아트가 등장한지도 20여년이 흘렀다. 이 분야의 역사적 발자취를 점검하는 한 권의 책(Anna Benthowska-Kafel, Trish Cashen and Hazel Gardiner(eds.), Digital Art History, CHArt Publications, 2005)에서도 『라오콘』의 반향이 목격된다. 즉, 이 책의 세 번째 부분(‘Online Art')을 구성하면서 햄멜(Michael Hammel)은 그린버그의 글을 차용한 “Toward a Yet Newer Laocoon. Or, What We Can Learn from Interacting with Computer Games" 글을 통해, 레싱이 그랬듯이 그리고 그린버그가 그랬듯이, 새로운 형식의 디지털 예술은 기존 예술에 대한 시각이 아닌 새로운 방식에서 이해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레싱의 『라오콘』에서 보여 지는 예술의 개별 장르에 대한 경계의 고찰은 시와 회화 간의 유사와 차이는 물론이고, 이 개별 예술을 각각 포함하는 제예술의 분류에 크게 기여했다. 즉 공간적 병존관계의 동시성ㆍ정지성ㆍ공존성의 예술과 시간적 선후관계의 계기성ㆍ운동성ㆍ추이성의 예술이, 예술작품의 존재론적 계기에 따라 구분되어, 명실 공히 공간예술과 시간예술로 불리게 된 것이다. 미래의 새로운 예술이 나타날 때 마다, 그 예술의 정체성에 의한 이해는 계속될 것이고 그때마다 레싱의 『라오콘』은 더 새롭게 인용될 것이다.

 

 

 

 

이승건
서울예술대 교수ㆍ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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