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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함석헌: (51)漫畵 같은 세월 속에 맞은 두 번째 해직
내가 본 함석헌: (51)漫畵 같은 세월 속에 맞은 두 번째 해직
  • 김용준 교수
  • 승인 2004.12.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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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4반세기가 흘러간 옛 일이지만 1980년 8월 27일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것은 아무리 생각을 고쳐해도 그것은 만화요 골계이다. 나는 지금 전두환 대통령 앞에서 손을 비비며 하나님이 내신 위대한 정치 지도자라고 참 꼴불견인 추태를 부린 기독계의 저명한 목사님 몇몇분을 연상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강준만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광주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지른 전두환 세력은 박정희 18년 독재가 낳은 사생아”였다. 그 위대하셨던 전두환 대통령께서는 지금도 만화요 골계를 계속 연출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광주항쟁이나 당시의 정계의 표정을 자세히 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전정권이 만화라면 그런 웃지못할 만화를 성사시킨 당시의 3金도 만화요 골계가 아니었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개인 차원에서 경험한 입맛이 씁쓸한 사건 하나를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나는 노명식 교수와 이미 타계한 조요한 교수와 어느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요새는 그런 풍경이 사라졌지만 그때는 신문의 가판이 성행하고 있을 때였다. 노 선생이 때마침 신문을 사서 펼치더니 별안간 “김 선생 이것 어찌된 거야?”라며 신문을 내게 내밀었다. 보니 함석헌 선생님이 김대중 씨의 대통령 출마를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럴 리 없다 싶어 곧바로 선생님 댁에 전화를 걸었다. 때마침 선생님께서 직접 받으셨다. 사연을 말씀드렸더니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흥분된 어조로 “큰일 낼 사람들이오. 이 노릇이 다아 돈 노름이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전화를 끊고 셋이서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전날에 선생님께 당시 선생님 주변의 한 명사의 부인이 성명서를 들고와서 지지 서명을 해주실 것을 말씀드렸다는 것이다. 그 성명서는 김영삼 김대중 양김의 원만한 합의에 의한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는 내용의 글이었다고 한다. 선생님도 읽으시고 그 별지에 서명을 해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 다음 날에 김대중 씨 지지성명으로 둔갑한 것이었다. 선생님께서 그때 전화로 하신 “돈노름”이라는 말씀의 내용은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모르고 있다. 미주알고주알 선생님께 캐어 여쭐 상황이 아니었다. 그 무렵 나는 기독교방송에서 5분 컬럼을 맡고 있었다. 이 컬럼은 어느 요일을 택해서 약 5분 분량의 글을 낭독하는 순서였다. 지금 내 기억으로는 다른 요일에 김동길 박사도 이 컬럼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떻든 나는 이 5분 컬럼에서 위의 일을 내용으로 담은 글을 써서 녹음을 했다. 함 선생님과 같은 원로 되시는 분을 이렇게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태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잘못된 일이라고 강하게 나무라는 글이었다. 대체로 실제로 방송으로 나가기 전 일주일정도 앞서 녹음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녹음한  다음날에 담당 PD가 나의 글의 일부분을 삭제해서 방송하겠으니 양해해달라고 전화했다. 나는 방송사의 사정에 의해서 나의 방송 프로그램 자체를 취소한다면 편집권의 문제니 어쩔 수 없지만 일단 내 이름으로 컬럼이 방송된다면 일부 삭제는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뜻을 전하였다. 그 후 몇 차례 전화가 오갔지만 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는데 결국 PD의 말대로 일부가 삭제된 채 방송되고 말았다. 그 이후 나는 컬럼을 중단하였다. 며칠 후 나의 방송된 컬럼이 그대로 당시의 야당 기관지에 게재되었다는 풍문은 들었지만 실제로 그 기관지를 보지는 못했다.


이 무렵에 발표된 성명이 134명 지식인 성명서이다. 이 성명서의 내용은 전두환을 옹호하는 신군부 세력은 정치에서 손을 떼라는 것이었다. 태평로 성공회 본당 옆 쎄실다방에서 몇 차례 모임을 가졌던 일이 생각난다. 지금 나의 눈앞에 어리는 얼굴은 이미 고인이 된 서남동 목사님이시다.


1979년 10월 26일 박대통령 시해사건 이후로 나는 학교에 칩거해 있었다. 무대가 바뀌지 않았나? 이제는 무대 위에서 활약해야할 배우의 얼굴도 달라져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더욱이나 나는 자연과학도 아닌가? 지나간 4년간의 공백 메우기도 벅찼다. 그래서 일체 두문불출 학교에만 처박혀 있었다. 차기 간사장으로서 대한화학회의 일도 만만치 않은 부담이었다. 당시의 나의 심정은 실험유기화학자로의 복귀 일념이었다. 그런데 일은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자연과학도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134명 지식인 성명서에 자연과학자가 전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자연히 거론된 사람이 나였다. 직접 누가 나에게 전달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처음 쎄실다방의 모임에 나가보니 이미 여러차례 모임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상황에서 마땅히 해야할 소리를 하는데 그리고 자연과학분야의 인사를 대신해서 참석해 달라는데 거부할 이유도 그리고 명분도 없었다. 직접 간접으로 장회익 교수, 송상용 교수, 모혜정 교수, 남천우 교수 그리고 김숙희 교수 등의 자연과학분야의 교수님들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특히 모처럼 성균관대학에 정착한 송상용 교수가 이로 인해 다시 그 직장을 읽게 된 것은 나에게는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 되고 말았다. 결국 자연과학계를 대표하는 134명 지식인 성명서 준비위원이 되고 말았다.


정보부, 보안사령부, 남영동, 서빙고 등등의 호칭으로 나의 주변 인물들이 연행되어가는 망이 점점 좁혀져 오는 것이 체감되었다. 지금 정확하게 기억되지 않지만 아마도 미국 기독교 고등교육제단의 프로젝트 관계로 홍콩을 다녀온 것이 6월 중순이라고 생각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출국이 가능했었던 것이다. 홍콩 충치대학 도서관에서 광주학살사건의 생생한 사진보도를 타임지 뉴스위크지를 통해 접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걸레가 되다시피 잘리고 먹칠되어 배부되던 외국잡지를 생각했던 일이 기억에 남아있다.


어떻든 당시 주간조선에 연재하고 있었던 하이젠버그의 ‘부분과 전체’의 원고를 가방에 넣고 내깐으로는 외박으로 피신하다가 옷 갈아입기 위해 잠깐 집에 들렸다가 다시 밖으로 나간 동네 어귀 후미진데서 정보부 사람들에 의해 연행된 것이 8월 중순경 아닌가 생각된다. 74년 초에 갔었던 중앙정보부가 아니었다. 완전히 현대화 되었다고나 할까. 지하실은 방음장치가 철저히 되어있는 취조실로 호텔을 방불케 하였다. 24시간 대낮같이 비치는 백열등 밑에서 2?3일을 보냈다. 전번과 같이 무엇을 날조하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는 어떤 서류를 주면서 이것을 읽고 그것에 맞추어 자술서를 작성하라는 것이었다. 읽어보니 변형윤 교수의 자술서였다. 그 자술서에 의하면 변 교수가 나를 지목하여 자연과학계 학자들의 서명을 받아 오도록 만들었다고 되어 있었다. 그 속에서 새삼스럽게 따지고 말고가 없었다. 대체로 변 교수의 자술서에 맞추어서 자술서를 작성하였다. 결국 집에서 도장을 가져와서 백지와 백봉투에 사직서를 써서 내 손으로 도장을 찍고 고려대학교 이사장 앞으로 내 집 주소에서 우편으로 보내는 백봉투를 봉인하는 것으로 나의 취조는 끝났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해직 경위다. 그래서 나는 다시 84년 7월까지 4년간 해직교수라는 명예직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1980년 2월 29일에 정부는 687명의 복권을 발표하였다. ‘씨?의 소리’지 1980년 3월호에 선생님의 ‘復權’이라는 글이 실려있다.

<진리란 무엇인가? 생명을 드러내는 길이다. 국가는 전체생활을 해나가기 위해 생각하는 인간이 그때 거기를 위해 만들어낸 하나의 잡은 것이지, 진리 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때 거기서 그 할 임무를 다한 담에는 사정없이 내버리기를 새 옷이 생겼을 때 낡은 옷을 벗듯이 하여야 한다. 그것이 나라 사랑하는 도리요 그 국가에 역사적 의미를 붙여주는 일이다. 이 시대에는 이 시대의 의식이 있다. 그 의식을 못 가진 사람이 낡은 시대의 것밖에 모르기 때문에 잘하노라 하면서도 하지 못하는 동안에 낡은 국가관 낡은 도덕을 강요해서 역사의 죄인이 되는 것은 가엾은 일이다…나는 오늘(1980.2.29) 아침에 명상하는 가운데 특히 老子의 가르침에서 얻은 것이 있으므로 그것을 여기서 말해보려고 한다.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其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致虛極이란 마음을 비우기를 철저히 하란 말이요, 守靜篤은 고요히 하기를 다시 없이 하란 말이다….>(전집8: 465-466)

전두환 정권의 만화와 골계도 그리고 광주학살이라는 대사건도 그리고 그 후로 계속되는 이 나라의 혼란도 치허극, 수정독을 하지 못한 이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 때문이라고 말하면 크게 잘못된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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