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21:05 (목)
당신은 아는가 :독일 녹색당의 상징, ‘불꽃여인’ 페트라 켈리(1947~1992)
당신은 아는가 :독일 녹색당의 상징, ‘불꽃여인’ 페트라 켈리(1947~1992)
  • 김조영혜 기자
  • 승인 2004.12.0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에게 만약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녹색입니다”

▲페트라 켈리는 짧은 생애 동안 불꽃 같은 삶을 살아왔다. ©
본 시내에서 북서쪽으로 후미진, 조그만 테라스가 있는 막다른 골목집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마흔네 살의 열정적인 평화운동가 페트라 켈리, 그리고 예순 아홉 살의 나토 전 사령관이자 페트라 켈리의 연인이던 게르트 바스티안, 두 사람이 죽었다. 
독일 경찰은 두 연인의 죽음을 동반자살로 발표했지만, 이들의 죽음은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녹색여신’, ‘불꽃여인’으로 불리며 독일 녹색당 창당을 이끌었던 페트라 켈리는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녹색운동의 상징이었다. 지금도 페트라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수면부족으로 눈가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으면서도 독일 연방의회 연단에 서서 열정적으로 ‘녹색희망’을 외쳤던 그녀를 떠올린다.

독일에서 태어나 양아버지의 나라인 미국에서 학업을 마친 페트라는 대학시절, 케네디의 선거운동을 벌이며 두각을 나타낸다. 국제정치를 전공한 그녀는 현실정치에 민감한 타고난 정치꾼이었다. 대학을 마치고 유럽공동체에서 일하게 되면서, 그녀는 원자력의 위험을 목도하고 평화운동, 녹색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그녀가 평생 동안 반핵운동에 투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개인적인 경험과도 직결돼 있다. 소아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녀의 동생, 그레이스 켈 리의 죽음이 방사선의 영향이었다고 여겼던 그녀는 방사선과 암의 관계를 규명하고 암으로 고통 받는 어린이들을 지원하는 ‘그레이스 켈리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녀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를 몸으로 실천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생계를 위해 유럽연합의 행정사무관으로 일하면서도 평화운동의 끈을 놓지 않고 1980년대 내내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독일 연방의회 국회의원으로 선출돼 생계가 보장되기 전까지 직장과 정치, 두 가지 일을 함께 처리하는 법을 터득해야만 했다.

몸이 약했던 그녀가 직장인 브뤼셀과 정치무대인 본을 오가며 활동을 벌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일도 잦았다. 그녀의 허약한 몸은 그녀 자신이 유도한 것이기도 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의 일이라면, 스쳐버리지 못했던 그녀는 스스로 일거리를 만드는 지독한 일벌레였다. 때문에 그녀의 사무실은 전 세계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팩스와 우편물로 늘 비좁았고, 그녀는 사무실에서 밤을 새며 수많은 문서들을 읽고 이에 답장을 보내는 일을 했다. 페트라가 티베트 독립운동과 제3세계 원주민 여성들의 모임을 지원했던 것도 달라이 라마와의 인연, 미국에서 접해야 했던 영어를 못하는 외국인 소녀에 대한 차별의 경험 때문이었다.

독일 연방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 전부터 페트라는 녹색운동의 스타였다. 마음을 움직이는 열정적인 연설, 그리고 다른 정치가들에게 쏘아대는 명중탄은 언론의 조명을 받게 마련이었다. 가녀린 몸집의 그녀가 쏟아놓는 해박한 지식과 집중된 에너지, 그리고 열정이 그녀를 스타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녹색당의 창립과 함께 최고 대변인으로 입후보할 때도 자신을 누구의 리더가 아니라 수많은 시비꾼 중 하나로 생각했다. 

페트라가 평화운동가에서 녹색당을 이끄는 정치인으로 변화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생태주의와 사회적 책임, 풀뿌리민주주의와 비폭력. 이 네 가지 축으로 설명되는 녹색당은 페트라에게는 평화운동의 방법론으로 여겨졌다. 페트라는 “우리 당이 운동을 그만 둔다면, 더 이상 존속의 의미가 없어진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녀는 1979년 ‘나머지정치연합-녹색당’을 창당에 앞서, “비폭력과 창조적인 방법을 통해, 환경운동과 평화운동 그리고 타협을 용인하지 않는 정당반대당, 즉 녹색당 운동을 통해 생명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그녀에게 녹색은, 환경만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기존 정치권력 방식을 뒤엎는 새로운 방식의 정치운동이었던 셈이다.

독일인들에게 녹색당과 페트라 켈리는 뗄 내야 뗄 수 없는 관계로 각인되는데, 그것은 녹색당은 페트라로 상징됐고, 페트라는 녹색당의 창당을 이끈 핵심멤버였기 때문이었다. 녹색당이 당내 분열로 이전투구할 때도, 페트라는 자신이 녹색당을 떠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난 녹색당의 일부잖아”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녹색운동의 잔다르크’라고 불렸던 페트라는 녹색당이 선거에서 패배하고 당내 극좌세력과의 마찰로 입지가 좁아지자 일선 정치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왕성한 활동력으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으며 열정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러던 그녀가 한 몸처럼 붙어 다녀 ‘페트랑게르트’라고도 불렸던 연인 게르트 바스티안과 함께 시체로 발견되자 그녀의 동료들과 그녀를 사랑했던 독일 국민들은 충격에 빠진다.

어는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죽고 싶은가, 라는 질문에 “혼자서 말고”라고 답했던 페트라가 죽을 때에도 그녀의 연인과 함께 했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녀의 죽음은 소련의 비밀경찰 KGB의 소행이라는 주장과 독일 통일 후 네오나치가 극성을 떠는 가운데 신변의 위협을 받아왔다는 증언, 티베트 문제에 열정적이던 페트라를 위시해 중국 정부가 개입했다는 설만 남긴 채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