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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을 포용하는 마음...'나'와 '우리'의 相生
이방인을 포용하는 마음...'나'와 '우리'의 相生
  • 김석수 / 경북대 철학
  • 승인 2004.1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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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서평: 『우리 안의 타자』(박구용 지음, 철학과현실사 刊, 2003, 400쪽)

오늘의 우리 철학은 서구 이론의 우월성에 주눅 들어 그들의 철학을 단순히 수입하기만 하는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다. 우리도 이제 그들의 이론을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서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생산적으로 적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우리의 철학’을 주체적으로 마련하고자 한다. 지난 2003년 12월에 출판된 ‘우리 안의 타자-인권과 인정의 철학적 담론’ 역시 이런 실험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21세기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삶의 문제, 그 중에서도 특히 타자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으며, 주체와 타자의 불행한 관계를 제대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라는 기반을 배제하고는 논의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나가 나이고 네가 너이기 전에 이미 나와 너는 나가 나로서 네가 너로서 서로 인정받고자 하는 ‘우리’라는 현실에 자리하고 있다. “나와 너의 사회적 관계는 ‘우리’라는 맥락 속에서 상이한 형태를 갖기 때문에 자아와 타자의 관계로 축소 환원될 수 없다.”(140쪽) 따라서 “자아와 타자의 사회적 관계가 ‘우리’라는 개념 틀을 통해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한다는 것에 주목하지 않는”(138쪽) 경우에는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

이 책은 이와 같은 기본적인 문제의식 아래서 ‘우리 밖의 타자’와 ‘우리 안의 타자’ 문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를 가로막고 버티고 있는 ‘우리 밖의 타자’를 제거하고자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우리 밖의 타자’를 제거하려고 하는 순간 ‘우리 안에 타자’를 만들어내며, 이 타자를 타자로서 인정하지 않는 불행을 겪게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은 특히 우리의 현대사에도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밖의 타자’에 의한 억압과 희생을 겪으면서 자기를 그 타자에 내맡기거나 아니면 그 타자의 도움을 받아 ‘우리 안의 타자’를 짓밟았다(65, 140쪽). 그래서 우리 사회는 비합리적인 집단주의가 횡행하고, 진정한 개인과 이들 개인들이 서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의 장인 ‘사회’가 제대로 마련되지 못했다(26쪽).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방인에 대해서 배려하고 환대할 수 있는, 또한 스스로가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 안의 타자’에 대한 자리가 마련되지 못했다. 우리는 원자적 개인주의의 확대로 ‘우리 안의 타자’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집단적 비합리주의의 심화로 ‘우리 안의 타자’를 배제하는 경향이 강하다(69쪽).

오늘의 우리에게 진정으로 문제되는 것은 바로 ‘우리 안의 타자’를 제대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 밖의 타자’는 우리가 그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고 우리의 투쟁 상대로 인정하는 타자이지만, ‘우리 안의 타자’는 타자로서 인정도 받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타자이다(143~144쪽). 정말 우리가 고민해야 하고 시선을 돌려야 할 타자는 이런 인정도 받지 못하는 ‘우리 안의 타자’이다. 이제 철학은 ‘우리 안의 타자’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새로운 이론적 기반을 만들어 내야 한다(7쪽). 그것은 자아 중심 철학이나 타자 중심 철학에서 마련될 수 없고, 자아와 타자가 서로 투쟁하고 사랑하는 인정 담론 위에서 마련돼야 한다(10쪽). 또한 그것은 개인의 권리와 정체성에 기반을 둔 정의의 원리와 차이를 인정하는 연대성의 원리의 종합에서 마련돼야 한다.

이 책은 이와 같은 입장에서 기존의 서구 철학 전반에 대해서 비판하고, 아울러 우리의 현실을 고민하는 철학자들의 편협성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은 정의와 연대성을 종합하고자 하는 하버마스조차 연대성보다 정의를 우위에 둠으로써 구체적인 연대성을 마련하지 못했음을 비판하며(101, 107쪽), 나아가 타자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레비나스의 입장도 ‘나와 다른 타자’의 초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인정의 장인 ‘우리’를 망각하고 있다고 비판한다(138쪽).

이 책은 ‘우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이름으로 동화되기를 강요하는 억압에 부단히 저항하고 ‘우리’의 부조리를 고발하면서 ‘우리 안에서 타자’의 “자리를 지키는 철학”(148쪽), 이른바 ‘이방인의 철학’을 강조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책은 철학자 김상봉을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가 이방인의 철학을 충분히 실현하고 있지 못하며, 오히려 ‘자기 상실’에 대한 그의 주장은 자기 사물화를 막아낼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146쪽). 이 책은 ‘나르시즘의 꿈이 변형된 마조히즘뿐만 아니라, 미메시스의 꿈이 좌절된 사디즘을 통해 표현되는 전면적 사물화’가 전개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자기상실’의 방법을 통해서 ‘우리 안의 타자’를 구해낼 수 없다고 본다(146쪽).

더군다나 이 책은 장은주의 주장(교수신문, 2004.09.10)처럼 홀로주체성에서 서로주체성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하는 김상봉의 주장이 서양 정신에 존재하지 않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정신의 심장부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즉 ‘서로주체성은 하이데거나 레비나스 이전에 이미 루소와 헤겔에서 증명된다.’(147쪽)라고 이 책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김상봉은 이들이 헤겔 속에서 찾고자 하는 서로주체성에 대해서 아주 비판적이다. 존재를 반성의 본질로 파악하고, “동일한 정신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내재적 대립을 지양하는”(교수신문, 2004.10.19) 헤겔에게는 ‘거울을 잃어버린 우리’가 ‘우리 바깥의 타자’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함께 찾고 있는 서로주체성이 자리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교수신문, 2004.09.29). 다시 말하면 헤겔의 인정이론에는 자기상실을 통해 타자로 넘어가는 과정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이 책은 자아와 타자 사이에 이런 인정받고자 하는 대립과 갈등의 과정 없이 ‘우리’가 되는 것은 곧 ‘우리 안의 타자’를 지워버리는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자기상실’이다. 이 책은 자기상실을 통해서는 서로주체성이 온전히 마련될 수 없다고 하는데 반해서, 김상봉은 이런 자기상실의 과정 없이는 서로주체성이 제대로 마련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결국 서양의 인정 논의 안에 자리하고 있는 ‘자기부정’과 여기에서 주장되고 있는 ‘자기상실’이 근원적으로 다른 것일 수밖에 없느냐, 나아가 다르다면 화해 불가능한 것인가가 문제다. 물론 김상봉도 서양의 정신에 나르시시즘적인 요소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구제불능의 악한 정신이라고 보려고 하지도 않듯이, 우리의 정신에 자기상실적인 요소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최고의 정신이라고 주장하려고 하지도 않는다(교수신문, 2004.10.30). 그 역시 “서양정신의 자기보존과 우리의 자기상실을 종합하고 지양하는 것”(같은 곳)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사실 자기보존과 자기상실에는 각기 장단점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당연히 相生관계에 놓여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상생관계를 어떻게 설득력 있게 마련할 수 있는가이다. 그래서 장은주도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닥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해결적 합리성’을 강조하고 있다. 분명 타자의 수난 시대를 극복하고 자아와 타자가 만나는 것은 단순히 미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이 책은 ‘타자의 문제’에 대한 좀더 적극적인 해결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군다나 우리철학의 방향을 타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학계에 중요한 기여를 할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서강대에서 '칸트에 있어서 法과 道德'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논문으로 '구체적 보편성과 지방, 그리고 창조학으로서의 인문학' 등이 있고, 저서로는 '현실 속의 철학 철학 속의 현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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