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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 『조선시대 양반가의 농업경영』(김건태 지음, 역사비평사 刊, 2004, 512쪽)
화제의 책: 『조선시대 양반가의 농업경영』(김건태 지음, 역사비평사 刊, 2004, 512쪽)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1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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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량 증감으로 토지생산성 규명키 어려워"

고종시대 논쟁의 쟁점 중 하나는 근대이행기 조선경제의 현실을 어떻게 볼 것인지다. 이는 다시 19세기 경제지표에서 드러나는 ‘바닥세’가 현실과 일치하는가, 1896년 이후 경제반등의 배경이 무엇인가라는 두가지 쟁점으로 나뉜다.

이영훈·김재호 교수는 19세기를 고갈과 파탄이라 했고, 이태진 교수는 말을 아낀다. 반등에 대해서 김재호 교수는 저점통과 현상이라는 견해며, 이태진 교수는 고종의 개입으로 인한 개혁성과라고 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증거부족 혹은 사실조합이라고 반박한 상태다. 위의 글에서 이헌창 교수는 더 많은 사실을 발굴해 위기가설을 검증할 필요가 있다며 유보적 입장을 취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출간된 김건태 성균관대 연구교수의 책 ‘조선시대 양반가의 농업경영’은 이 부분에 관해 좀더 내재적·미시적으로 판단해볼 만한 몇몇 실상을 보여주고 있어 눈길을 끈다.우선 양측이 토지생산성을 두고 다투는 ‘지대량’이 합당한 기준인지 문제제기한다. 저자는 “논 한 마지기에서 쌀이 총 몇 가마니가 나왔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지주가 수취해간 분량(지대율)의 증감을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다”라는 입장이다. 또 지대는 토지생산성뿐만 아니라 다른 요인들에도 영향을 받는다. 문제는 19세기 지주들이 18세기 지주들과 달리 생산량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록존재의 여부는 발굴의 진전을 두고볼 문제지만, 현재로선 토지생산성을 논할 객관적 여지가 축소되는 셈이다. 그러니 당대의 현실에 최대한 정확히 낙하착지할 수 있는 다양한 묘책이 요구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양반’을 포인트로 살린다.

양반들이 노비나 양민 같은 作人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면서 농업경영을 전개해왔나를 조선전기부터 식민지기까지 일관되게 살피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양반들은 18세기까지 풍족히 살았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토지가 줄고 생계가 어려워졌다. 지방 선비의 중앙진출이 막히면서 더욱 토지확보가 힘들어지고 자손들에게 분할상속해 재산이 축소 평준화됐다. 따라서 향촌사회에서의 지위에 위협을 느낀 양반들은 장자상속 같은 제도를 만들어 ‘몰아주기’를 시도해보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게다가 논에 집착한 양반들과 달리 밭작물의 상품화에 성공해 부농이 된 양민들과의 관계 속에서 더욱 위축된 양반들이 결국 사돈팔촌이 모여 ‘문중지주제’ 시대로 접어드는 과정을 스케치하는 부분들을 보면 그 지난함이 피부에 와 닿고, 거기다 이앙법이나 이모작 같은 신기술의 성패에 따른 지역별 희비교차, 지주와 소작농이 한편에서는 서로의 이득을 놓고 밀고 당기며 다른 한편에서는 지역공동체를 위해 감싸주는 모습 등을 보면 살아있는 농촌사회를 느낄 수 있다.

이런 이 책의 장점은 당시 농촌 실상을 생생하게 담은 秋收記, 日記, 土地賣買文記, 分財記를 지역별로 광범위하게 수집,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획득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될 듯하다.

이렇게 살펴보니 지대량의 증감요인에 대한 색다른 관찰도 생긴다. 19세기 부세정책이 경직되자 힘겹게 된 양반들이 공동촌락을 이뤄 공동소유지를 경작하는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인지상정상 지대량을 낮추게 됐다. 반면 중앙관직에 진출한 지주들은 향촌 여론에 민감할 필요가 없어 지대량을 높였다는 것. 따라서 문중지주 토지의 지대량으로 토지생산성의 격감을 논하기는 곤란하다는 것이 이 책의 메시지로 보인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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