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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수학자 이가환(1742~1801)
조선후기 수학자 이가환(1742~1801)
  • 교수신문
  • 승인 2001.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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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조선최후 수학천재의 불운
/ 전북대 강사·과학사

이가환은 정약용과 함께 국왕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정조의 개혁적인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인재로 큰 기대를 받았으나 불운하게도 정조의 죽음과 함께 신유박해(1801년)로 역사에서 사라진 재능이 아까운 인물이었다. 그런데 정약용이 실학의 집대성자로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있는데 비해 이가환의 저서는 그의 얇은 문집과 ‘錦帶殿策’이라는 제목의 필사본 策文集이 전할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명성에 비해 그의 생애와 사상은 대략 추정만 할 뿐 정확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대 최고의 수학자였다는 평가도 그러한 추정 중에 하나일 뿐이다.

이가환이 천문학과 수학에 조예가 깊었음은 여러 기록에 보인다. 정약용이 이가환의 ‘묘지명’에서 술회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학문은 유가사상은 물론이고 제자백가와 역사 및 문학 등 다방면에 걸쳐 전문가적 학식을 갖추었으며, 천문학과 수학, 그리고 의학 등 자연과학에도 남 다른 이해를 했다고 한다. 즉 다방면에 박식했지만 특히 천문학과 수학 등 자연과학에 전문가적 지식을 지녔다는 것이다. ‘황사영의 백서’에 의하면 이가환은 “내가 죽으면 동방에 幾何의 種子가 끊어질 것이다”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이 기록은 이가환이 정조대 최고의 수학자였다고 평가하게 된 결정적인 문헌기록이었다.

천문역산개혁의 이론적 토대

전문가적인 자연과학 지식을 지녔고, 특히 당대 최고의 수학자로 이해되는 이가환이지만 그에 부합하는 관련 저서를 거의 남기고 있지 않다. 서학의 괴수로 지목 당해 사형을 언도 받고 옥사했던 말년의 처지 때문에 저서가 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연과학 관련 저술을 하지 않은 듯하다. 그의 천문학과 수학에 대한 지식의 깊이와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것은 실록과 같은 연대기 자료에 있는 간략한 기사들, 그리고 ‘금대전책’에 실려있는 그의 ‘天文策’이 전부이다.

‘정조실록’ 1778(정조 2)년 2월 14일조의 기록은 문과에 급제한지 1년밖에 안되는 이가환이 두각을 나타내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고위 관료들이 배석한 자리에서 정조가 정9품의 하급관리에 불과한 이가환을 불러 경서에 나오는 여러 의문점들을 질의하는 매우 길고 자세한 기록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가환은 서양역법이 이마두(마테오 리치) 혼자서 만든 것 인줄 알고 있던 정조에게 이마두 이후 탕약망(아담 샬) 등이 만들었으며, 나아가 서양역법이 아무리 우수하다하나 세월이 오래 지나면 반드시 오차가 생기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789(정조 13)년경에 작성했을 ‘천문책’은 이가환의 천문학에 대한 식견과 천문정책을 유감없이 드러낸 유일한 기록이다. 이 해에 정조는 근래의 학자들이 천문학에 무지한 실상을 개탄하면서, 신료들로 하여금 중국의 역법에 비해 뒤떨어진 조선의 역법을 독자적으로 정립할 방안을 강구하라는 책문을 내렸었다. ‘천문책’은 이때 이가환이 응대해서 써 올린 것이다.

이가환은 세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그것은 제대로 된 역법, 즉 천체운행을 가장 정밀하게 계산해내는 시헌력과 같은 우수한 역법을 제정하자는 것이 첫째, 간의나 앙의와 같은 전통적 관측기구 대신에 상한의나 망원경 같은 서양식 관측기구를 제작하자는 것이 둘째, 그리고 시헌력을 완벽하게 소화해낼 천문역법의 전문가를 교육시켜 길러내자는 것이 셋째 방안이었다. 세 가지 방안을 통해서 공통되는 것은 우수하고 과학적인 서양 천문학을 적극 수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1789년에 이루어진 천문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정책과 그 성과를 보면 이가환이 그의 ‘천문책’에서 제시한 방안들이 대폭적으로 수용된 것이 아닌가 짐작케 한다. 즉 그 해에 바로 천문역산 전문가 김영을 발탁했고, 그를 중심으로 서양식 관측기구인 ‘적도경위의’와 ‘지평일구’를 제작했으며, 그것을 이용해 얻어낸 관측 데이터로 ‘누주통의’와 ‘신법중성기’를 편찬함으로써 표준시간 체제를 정비했던 것이다. 또한 2년 후 1791년에는 보다 광범위한 천문역법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정조대 천문역산의 개혁이 이가환이 ‘천문책’에서 다루어진 방안대로 이루어졌지만 그는 직접적인 역할은 거의 하지 못했다. 이가환은 1791년 신해박해로 반서학 정치공세의 공격을 받기 시작해 그의 거듭된 해명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반서학의 정치공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반서학 정치공세로 곤혹 치르기도

어쨌든 관상감 제조로 줄곧 천문역법 개혁의 책임을 맡았던 사람은 비교적 반서학의 정치공세에서 자유로웠던 서호수였다. 그의 지휘로 ‘국조역상고’(1796년 간행)를 편찬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정조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청나라에서 편찬된 서양식 천문학을 활용한 방대한 서적 ‘율력연원’을 능가하는 천문역산서의 편찬을 원했다. 정조의 원대한 꿈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마침 서호수가 죽자(1798년) 그 적임자는 이가환 외엔 없었다.

그러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정조 말년은 반서학의 정치세력들이 왕권을 위협하던 매우 다급한 정치상황이었고, 이가환은 채제공을 이어 남인의 영수로 떠올랐지만 이미 수 차례 반서학의 정치공세로 곤혹을 치르는 등 반서학 정치세력의 주공격 대상이 되어 있었다. 결국 이가환은 반서학의 정치공세 때문에 어렵겠다는 생각을 정조에게 전했다. 곧 이어 정조가 승하하고, 다음 해 이가환도 서학의 수괴로 몰려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당대 최고의 수학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한 번도 그러한 재능을 써 보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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