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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방법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방법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11.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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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행운아』『말하기의 다른 방법』『제7의 인간』(존 버거·장 모르, 눈빛 刊)

물자체’와 ‘숭고’ 개념으로 칸트는 자기한계를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 자제하라고 충고했다. 당시는 물론이고 요즘도 유익한 이런 인식은 그러나 포착할 수 있는 것을 부러 배제시키는 기제로 작용하는 경향도 있다.

유대주의와 유물론을 화학작용시켜 역사철학테제를 쓴 벤야민처럼 인간의 모든 미세한 경험들을 언어화하려는 지적 시도는 소중하다. 요즘 학문과 예술의 언어들은 지나치게 칸트적 공리에 얽매이거나 무늬만 벤야민인 경우가 많아 아쉽다. 이런 불구의 언어들은 그 스스로 비참한 상태에 머물지 않고 이데올로기화 한다.

여기 놓인 세 권의 책은 불충분한 우리 시대의 인식들 앞에서 느끼는 불모의 감정을 위로해준다. 영국의 문필가 ‘존 버거’와 프랑스의 사진가 ‘장 모르’가 함께 작업한 이 책들은 사진에세이를 넘어선다. 이들은 말하기의 두 문법을 상호 영향관계에 놓음으로써 인식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가기에 특별히 주목된다.

‘행운아’(김현우 옮김)는 영국 한 시골마을의 행복한 의사 이야기다. 그가 행복한 이유는 매우 특별한데 존 버거는 철학적 에세이로 그 이유를 설명한다. ‘제7의 인간’(차미례 옮김)은 다큐멘터리 성격이 강하다. 1970년 유럽으로 건너간 이민노동자들의 비극적인 생활에 깃든 미묘한 존재의 현실을 예리하게 잡아낸다.

‘말하기의 다른 방법’(이희재 옮김)은 사진이란 무엇이고, 사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을 시도한 것으로 장 모르가 직접 글을 쓰는 등 역할이 두드러진다.

“한 무리의 송아지들이 줄지어 선 곳 근처에서 사내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거기서 뭘하는 거요?’ ‘선생과 선생의 소를 사진 찍고 있습니다.’ ‘내 소를 사진 찍는다. 자네들 생각은 어때? 나한테 동전 한푼 안 내고 내 소를 꿀꺽하시겠대!’ 나는 그들과 함께 웃었다. 그리고 돈도 안내고 허락도 안 받고 내 방식대로 찍었다.”(13쪽)

장 모르는 자신을 찍을 때마다 얼굴을 위장했다. 멋있게 보이려고 말이다. 하지만 자기가 찍는 사람들은 온갖 약점을 드러낸 채 자신 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얼굴에 긴장을 풀었고, 그런 후 “선생님은 사무엘 베케트를 닮으셨군요”라는 말을 들었다. 이런 일화들이 이어진다.

그는 “내 사진을 설명할 필요를 가끔 느낀다”라고 말한다. 영상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는 자족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사진에 대해 직접 말하기보다 여러 명에게 설명을 맡겼다. 소녀가 인형을 안고 울고있는 사진, 파이프 위에서 자고 있는 사람의 사진을 정원사, 목사, 정신과의사, 미용사, 여학생, 은행가 등에게 보여줬다. 모두 나름의 느낌을 말한다. 장 모르는 “이들은 사진에 대해 말하면서 무의식중에  자신의 마음을 사진에 투사한다. 사진은 일종의 뜀틀과 같은 것이다”라며 빈 공간을 개성적으로 메운다.

2장에서 존 버거는 사진과 그림의 근본적 차이를 언급한다. 그림은 그려지는 시간을 그 속에 담고 있지만, 사진은 순간의 예술이라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따라서 사진 감상엔 사진의 전후를 상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단순하지만 중요한 지적이다. 이 책이 제목값을 하는 것은 275쪽에 가서다. 버거는 “모든 이야기는 불연속적이고, 이 불연속성을 이어주는 것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라고 말한다. 근대적 사고는 말하기의 주체와 객체를 지나치게 강조해왔다. 합의는 두 사람이 하는 것이고.

하지만 그는 “두 사람은  주변부일 뿐 중심에 있는 것은 이야기 속의 사람이다. 말해지지 않은 걸 연결시키는 것은 그의 행동, 특징, 반응이다”라고 말한다. 이야기의 불연속성이야말로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주인공을 하나로 융합하는 조건이고, 그 융합체를 버거는 이야기의 ‘반성적 주체’(reflecting subject)라고 부른다.

‘행운아’는 글쓰기의 이 複數 주체가 잘 구현된 작품이다. 이 책은 머리말도 후기도 없다. 책이 씌어진 배경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곧바로 “풍경은 기만적일 수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시골의사가 환자를 방문해서 환자의 육체적·심리적 고통을 달래주는 단편이야기를 너댓편 소개한다. 그리고 나서 ‘사샬’이라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사샬은 그가 받았던 아이가 임신을 해서 낙태수술을 하러 찾아올만큼 이 마을에서 오래된 의사다. 처음엔 외과의로서 치료만 했지만, 점점 상담까지 하게 됐다. 그렇게 프로이트를 읽었고, 사람들이 털어놓는 이야기들을 기록해나갔다.

서로간에 친밀해진 그와 마을 사람들 사이엔 새로운 관계가 생겨나고 그 관계를 살아가는 사샬의 방법은 일종의 ‘총체성’의 추구로 나타난다. 그는 마을의 이장이며, 의사이며, 마을에 대한 역사가이며 동시에 세계적인 의학저널을 놓치지 않고 탐독하는 명의로 존재한다. 존 버거는 “총체적으로 되고 싶어하는 사샬의 욕망은 단순히 개인적인 과대망상으로 치부할 게 아니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에 부합하면서도 억압되어 있지 않은 그런 경험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경험에 대한 그러한 열정을 만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서, 현대사회에서  서른 살 이후의 사람들의 상상력은 사장된다. 사샬은 운좋게 예외적인 인물이다”라고 말한다.

사샬과 마을 사람들을 결정적으로 구분시키는 것은 ‘상식’(commonsense)이다. 세상과 고립된 그들에겐 상식에 대한 관념이 없어 자신들의 언행이 상식이라는 걸 깨닫지 못한다. 상식은 수동적이고 세상에 대해 경계적이며, 지금의 자신의 처지를 만든 사회적 조건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다. 사샬은 상식 뒤에 감춰져 있는 마을 사람들의 능동적 욕망이나 바람을 일깨워주고 그것을 대화의 주제로 삼을 수 있었다. 그의 기록행위를 이끌어낸 것도 이것이다. 사람들은 곧 그 대화내용을 잃어버리지만 사샬은 그들과 다시 만날 때 “그거 기억나십니까?”로 말문을 열곤 한다.

이러면서 사샬은 그 조그마한 세계를 기록하는 書記의 의미와 역할을 깨달아 간다. 사샬과 오랜 대화를 나눈 버거는 그런 그가 행운아라며 부러워한다. 이 책은 사샬이라는 행운아를 성공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회학적 조사방법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말하여지지 않은 마을의 풍경을 건진다. 그것은 이야기의 반성적 주체에 대한 버거와 모르의 의기투합 때문에 가능했다. 두 사람의 책을 읽는 독자들은 사진과 글이 부딪히며 빚어내는 불협화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사진과 글은 그저 삶을 잘 말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뿐이므로.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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