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09:50 (금)
생각하는 이야기: 딸의 수능시험 날에
생각하는 이야기: 딸의 수능시험 날에
  • 오이환 경상대
  • 승인 2004.11.2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이 대입 수능 시험 날이라고 한다.

어제 모처럼 술자리가 있어 나갔더니, 합석한 세 명이 다들 외동딸의 수능 전날에 아버지가 이런 자리에 나와도 되느냐고 했다. 그러나 그 자리가 파한 후 동료 한 명과 더불어 2차를 갔다가 제자 한 명을 불러내어 밤 한 시 무렵까지 어울렸고, 오늘 밤에도 다른 모임이 있어 또 나가 볼 예정이다. 아침에 아내가 운전해 딸을 고사장까지 데려다 줬고, 저녁엔 좀 일찍 퇴근해 내가 운전하는 차로 함께 고사장에 가서 딸을 태워 오자고 한다. 처음엔 난색을 표했다가 그 정도의 아비 노릇은 해야겠다고 생각해 수긍했다. 


일요일엔 아내와 더불어 이런저런 산악회를 따라 등산 가는 것을 상례로 삼고 있다. 지난 일요일엔 출발 직전에 아내가 수능을 며칠 앞둔 딸을 두고 놀러 가는 것이 미안하다고 말하기에 좋을 대로 하라고 했더니, 결국 아내는 집에 남고 나 혼자서 문경의 봉암사 뒤에 있는 희양산에 다녀왔다. 다른 집도 대체로 그런 편인지 모르겠으나 우리 집에서는 이것이 상례인 셈이다. 근자에는 아내가 매일 아침 여섯 시 무렵에 일어나 딸을 깨워주고, 밥을 챙겨 먹인 다음 운전해 등교시켜 주며, 하교 후에도 딸과의 대화는 아내가 도맡아 한다. 나야 등·하교 때 인사를 받는 정도가 고작이고, 그나마 딸이 방과 후 바로 독서실로 가는 경우가 많기에 퇴근 후에는 얼굴을 보지 못하고서 취침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여러 달 전 어느 휴일에 아내가 모처럼 딸을 데리고서 시내에 있는 설렁탕 집으로 가서 함께 점심을 먹자기에 그렇게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아내로부터 들은 얘긴데, 우리 딸은 대학을 마친 후 해외로 나가 가난한 나라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생애를 보내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딸에게 물어보니 그것은 사실이며, 자신을 이해해 주는 좋은 사람이 있으면 결혼해도 좋지만 한평생 독신으로 살아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의대를 희망하는 이유도 아내가 원하는 것처럼 나은 수입을 바라서가 아니고, 그러한 봉사활동을 하려면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전문적인 기술을 지니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판단한 때문이라고 한다. 이미 꽤 오래 전부터 방학만 되면 가족 세 명이 함께 해외로 나가 패키지여행을 하고서 돌아오는 것을 연례행사로 삼고 있는데, 그것이 자기에게 그런 꿈을 가지게 했다는 것이었다. 그 날 딸은 우리 집처럼 자녀의 공부에 대해 주문을 달지 않는 부모는 이례적이라는 말도 했다.


지난 8월의 어버이날에 딸로부터 이메일 그림엽서를 받았다. 거기서 딸은 자신의 장래 계획에 대해 아내가 걱정을 하고 있다면서 내 생각은 어떤지를 물어왔다. 나는 다음과 같은 회신을 보냈다.


“아버지는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공부하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고, 또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도 부모로부터 이런저런 요구를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 내 아버지는 언젠가 내가 경찰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한 적이 있었던 것 같으나, 그걸 별로 강하게 요구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므로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이다. 나로서는 평소 그러한 부모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터이므로, 내 자식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요구를 하지 않고서 자신의 길을 자기 식으로 걸어가도록 지켜보고 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나로서는 한국의 대부분 가정들이 그러한 것처럼 네 어머니도 너를 지나치게 보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로서는 네가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고 장차 닥쳐올 세상의 비바람 속에서도 스스로 꿋꿋이 헤쳐 나갈 수 있는,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책임감 있는 인격체로서 성장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내가 철학을 선택했듯이, 너에게도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부여되어 있을 것이다.”


아내의 말로는 이제 딸이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 우리로부터 떨어져 살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점차 우리 품을 떠나가게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 내외에게 본격적인 노년기가 시작되는 셈이다. 딸은 그런대로 공부를 잘 하는 편이지만, 의대에 진학할 정도의 성적은 못되는 듯하다. 어쩌면 딸의 인생 설계 자체가 아직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딸이 어떤 전공을 선택해 어느 대학에 진학하게 되든지, 그리고 자신의 설계가 바뀌게 되든지 말든지, 그것은 딸의 삶이니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이환 / 경상대 동양철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